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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제로 디그리 Prologue

부치지 못한 편지



1

지민이 형. 나예요, 정국이. 이게 형한테 무사히 전달되었으면 좋겠어요. 사실은 이런 편지 쓰고 싶지 않았어요. 꼭 이별하는 것 같잖아요. 영원히 이런 편지 쓸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게 많네요. 최근 들어 그런 게 더 많았던 거 같아요. 그래도 나는 형을 만난 걸 후회하지 않아요. 형도…그렇죠? 혹시나 나 때문에 형 인생이 망가졌을까 봐 조금 무서워요. ……. 혹시 울고 있는 건 아니죠? 그러면 내가 너무 슬플 것 같아요. 울지 마요. 이제 내가 닦아줄 수 없잖아요.

나는…괜찮아요. 정말로요. 형을 만난 건 기적이었어요. 이 생각에 변함은 없어요. 다시 돌아가게 된다 해도 형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할 거예요. 사실은요, 예전에는 조금 무서웠어요.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 게 아닌지, 나라는 존재가 형에겐 짐이지 않을지. 근데 지금은 아니에요. 나에게 형이 하나뿐인 소중한 존재인 거처럼 형한테도 내가 그렇단 걸 알았으니까요. 그래서 견딜 수 있어요. 나는 정말 괜찮아요. 형을 보지 못하는 건 조금 안 괜찮지만…. 보고 싶어요. 밥은 잘 먹고 있어요? 귀찮다고 안 챙겨 먹고 그러면 안 돼요. 돌아가면 다 확인할 거니까요.

음. 사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분명 할 말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괜찮아요. 다시 만나면 해주면 되니까요. 아프진 않죠? 병원은 갔어요? 어디 아프지 말고 기다리고 있으면 내가 갈게요. 꼭 뒤따라 갈 거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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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요. 할 말이 많은데 하지 못하는 건…이게 정말 마지막이 될까 봐 무서워서 그래요. 영화를 보면 다 고백한 후에 꼭 돌아갈 수 없게 되잖아요. 그냥…진짜 그렇게 될까 봐. 물론 우리가 그렇다는 거는 아니에요. 기분이 그렇다는 거죠.

…형. 처음 눈을 뜨는 순간부터 나는요. 항상 생각했었어요. 내 존재의 의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니까 되게 거창한 거 같다. 그냥 나라는 존재가 뭔지 혼란스러웠어요. 가족이라는 말에 대해서도요. 그리고 형을 만난 이후로 내 안에 맴돌던 수많은 질문에 답할 수 있게 되었어요. 나의 답은 형이에요. 아이참…글로 쓰는데도 왜 이렇게 부끄럽지? 그래도 다음에 만나면 진짜 멋있게 안아주면서 말할 거니까요. 기대하고 있어도 좋아요.

형을 만난 이후로 하루도 형 생각을 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요즘은 정말 형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요. 그날 밤 아픈 형을 옆에 두고 많은 생각을 했어요.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형은 다 알고 있겠죠? 맞아요. 형은 이 말을 들으면 화내겠지만…그때의 나는 내가 형을 다치게 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형은 치료를 받아야 했고요. 거기서 내가 무얼 할 수 있겠어요.

한때 내 세상의 전부였던 하얗고 작은 방에 다시 돌아가는 게 예전에는 막연히 무섭다고 생각했었는데 이곳으로 돌아오는 길이 그렇게 무섭지 않았어요. 형은 나의 세상을 변화시키고 나는 형으로 인해 세상을 배웠어요.

솔직히 말하면 내가 떠나는 게 형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이걸 보면 형은 분명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화를 내겠죠? 알아요. 더는 그런 생각 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에도 형이 보고 싶어 미치겠으니까. 형 없는 나는 존재하지 않아요. 그래서 조금 욕심 내보려고요. 중요한 건 형과 나라는 걸 이제 아니까요. 형도 분명 나와 같은 마음일 거라고 확신할 수 있어요. 맞죠? 나와 같은 마음인 거.

…그치만 세상엔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더 많다는 것도 알아요. 그래서 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거예요. 이제 내가 어떻게 될지 같은 거 무섭지 않아요. 나는 형을 지키기로 했으니까요. 다시 만나는 날엔 고생했다고 그냥 한 번만 안아주세요. 아니, 고생했다는 말도 필요 없어요.

그러니까, 형. …보고 싶어요. 얼른 만나러 갈게요. 사랑해요.

 

 

 



2

잘 지내고 있나, 자네. 나는 그토록 바라던 M사 수석연구원 자리에 앉게 되었어. 우리의 꿈을 이룰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겠지. …걱정하지 말게. 약속하지 않았던가. 자네의 못다 한 꿈까지 내가 이뤄내겠다고. 실제로 나는 T-001의 개발에 성공했네. 그 오래전 자네와 내가 연구실의 한구석에서 머리를 맞대고 그려냈던 모습과 똑 닮아 있었지.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의 예상보다도 훨씬 정교하고 똑똑하다는 점이려나. 처음 눈을 뜬 그 아이는 꼭 어린아이 같았어. 꼭 자식이 생긴 기분이었지. …나도 잘 알고 있어, 실제 내 자식이 아니라는 것도. 이런다고 한 번 잃은 아이를 다시 데려올 수 없다는 것도. 그래도 빗대어 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겠나. 자식을 잃은 부모가 어떻게 되는지 자네는 가까이에서 본 적이 없으니 모를 테지만, 그건 꽤 끔찍한 일이지. 자네가 떠난 후, 자네의 모친도 그러하였으니.

T-001의 개발에는 성공했지만, 자네와 내가 꿈꿨던 그런 사회가 현실이 되기까지는 아직도 한참이나 갈 길이 먼 것 같네. 나는 벌써 두 번이나 공식적으로 이 아이의 폐기처리를 해야 했어. 소장은 아직도 T-000. 그러니까 ZERO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서 더 쉽지가 않네. 그런데 말일세. ZERO는 정말 오작동을 일으켰던 걸까? 이 물음이 머릿속을 떠나지를 않아. 나와 소장은 오작동이라고 판단했지만, 자네는 생각이 달랐었지. 이제 와서 자네의 생각이 맞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네.

어쩌면 나도 소장도 ZERO가 단순 오작동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다만, 오작동이라고 판단을 내린 것은, 아니, 그래야만 했던 것은 그 일이 ZERO의 의지로 벌어진 일이란 걸 부정하고 싶은 생각이 깊은 무의식 속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라.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우리의 손으로 괴물을 만들어낸 것이 되니까.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나는 두렵다네. 내가 만들어낸 것이 사실은 괴물은 아닐지. 왜 이 사안들이 하나같이 금기시됐는지. 최선이라 생각했던 나의 선택이 사실은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리는 것은 아니었는지. 그런데도 나는 후회를 하지 않을걸세. 자네와 약속하지 않았던가? …그래. 그렇게 보지 않아도 잘 알고 있네. 자네와의 약속은 핑계이고 다 나를 위한 것이란 걸. 이렇게라도 내 선택이 옳다는 것을 정당화하지 않는다면 나는 내 작은 천사를 잃은 것을 도저히 맨정신으로는 견딜 수가 없어. 자네가 이해해주길 바라.

처음 T-001이 눈을 떴던 날 나는 여러 가지의 미래를 떠올렸네. 물론 우리가 꿈꿔오던 성공을 가장 바라고 있었지만, 마음 한 편에 가장 최악의 상황을 그리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어. 그러면서도 나는 소장의 손길을 피해 그 아이가 영리하게 달아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 이번에는 다를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예상대로, 아니 바람대로 두 번의 실패는 없었어. T-001은 훌륭한 인격체가 되었으니까. …그래. 우리의 이론이 틀렸던 게 아니야. 혼란스럽고 불안정한 정서를 안정시켜줄 필요가 있었을 뿐이지. ZERO를 만들었을 때의 우리는 그걸 차마 알지 못하였고. 그래도 나는 이 일을 그만둘 생각이 없네. 자네도 그걸 바라고 있겠지.

아, 그러고 보니 이 말을 하지 않았더군. 내가 어떻게 수석연구원의 자리에 앉았는지 말일세. 설마 소장이 나를 그 자리에 앉혔다고 생각하는 건 자네도 아니겠지. 이곳은 연구소이긴 하지만 그 이전에 하나의 기업에 속해있는 곳이지. 여기까지 들으면 감이 좀 오는가? 그래, 본사 사람의 입김이 작용한 결과지. 나는 그가 필요로 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고, 그는 내게 자리를 줄 수 있었지. 그가 필요로 하는 기술력이 뭐냐고? 정말 모르는 건 아니겠지. 나에게 필요로 하는 기술력이라는 건 뻔하지 않나. 그래. 그는 죽은 약혼녀를 잊지 못하는 불쌍한 남자야. 나는 그에게 죽은 약혼녀의 성격과 기호를 건네받았고 이 데이터를 프로그램화해서 제공했을 뿐이네. 이미 존재하는 데이터를 이용하는 작업은 우리가 해왔던 어떤 일보다도 쉬웠어. 그 불쌍한 남자는 아주 만족하며 나의 뒤를 봐주기로 한 약속을 지켰지. 이 얼마나 좋은 일이지 않은가. 상용화만 될 수 있다면 사랑하는 일은 잃은 슬픔에 잠겨야 하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을 걸세.

…그래. 자네가 걱정하는 게 뭔지도 잘 알고 있네.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문제! 자네는 삶의 말미에 이 문제에 사로잡혀 할 수 있는, 해야 할 일도 그르쳐 버렸지. 그래서 얻은 결과가 결국 무엇이었나? 과학의 발전을 위해서는 눈을 감고 못 본 척해야 하는 부분도 분명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건 자네였지 않나. …자네를 질책하는 건 아닐세. 아쉬운 마음에 한 소리니 이해해주게나.

…T-001은 내 자식일세. 그건 ZERO도 마찬가지야. 나는 두 번 다시 내 자식을 잃고 싶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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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또 편지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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