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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제로 디그리 02

뜻밖의 동거인



업체 측의 실수로 예상과 다른 기능의 안드로이드를 가지게 되었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민은 매우 만족하는 중이었다. 보급형인 가정용 안드로이드에 비하면 고급제품군에 속하는 모델이라서 그런지 정국에겐 지민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기능이 있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정국을 보고 있으면 종종 정국이 안드로이드임을 잊기도 했다. 지나치게 사람처럼 행동하는 면이 그런 생각을 하게끔 하였는데 예를 들면 지금과 같이 식탁에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모습을 정국이 보이거나 할 때였다.

지민은 손바닥에 볼이 눌린 채로 졸고 있는 정국을 보며 새어 나오는 웃음을 작게 흘렸다. 가서 볼이라도 꼬집어주고 싶었다. 그런 지민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국은 “색색거리다”라는 단어를 형상화한 모양새로 꾸벅꾸벅 잘만 졸았다. 지민은 뜨거운 커피를 홀짝이며 그런 정국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얼굴에는 미소를 가득 채운 채였다.

어디 가서 털어놓은 적은 없지만, 최근 들어 급격하게 밀려오는 외로움에 지민은 제법 시달리는 중이었다. 먼저 가사용 안드로이드를 구매하여 요리킹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주고 오순도순 잘살고 있다며 자랑하던 친구 재민의 말에 콧방귀를 뀌던 모습이 생생한데 술김에 덜컥 안드로이드를 구매해버릴 정도로 외로움이라는 녀석은 지민의 안에 꽤 크게 자리 잡고 있었던 모양이다. 재민은 물론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알리진 않았다. 아니 못했다. 안 살 것처럼 굴어놓고 하룻밤 사이에 안드로이드를 샀다고 말하기엔 눈치가 보였다.

그런 이유로 아직 아무에게도 알리진 않았지만, 안드로이드를 구매하고 우연히도 업체 측의 실수로 제품이 바뀐 것은 큰 행운이라고 지민은 생각했다. 정국이 집에 온 후로부터는 꼭 동거인이 생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더는 퇴근 후 어두컴컴한 집으로 돌아오지 않아도 됐다. 적적한 아침 식탁도 안녕이었다.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안드로이드가 있었다고 해도 외로움이 덜 했을 텐데 사람과 비슷한 모델은 어떻겠는가.

지금처럼 아침마다 식탁 앞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모습이나 퇴근하고 돌아오는 자신을 맞기 위해 현관으로 달려 나오는 모습들을 보고 있으면 더 귀여운 동거인이 생긴 거 같고 그랬다. 이름을 정국이라고 붙여놓은 것도 한몫했다. 왜 진작 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민은 만족 중이었다.


“정국아.”


지민은 커피잔을 내려놓곤 졸고 있는 정국을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불렀다. 정국은 깊은 잠이 들기라도 한 듯 답이 없었다.

안드로이드도 이렇게 잠이 많은가 싶을 정도로 정국은 깨어 있더라도 잠에 취해있는 시간이 길었다. 처음 그런 정국을 보곤 애초에 안드로이드인데 잠을 잔다는 것 자체에 의문이 들었었다. 이런저런 정보를 찾아본 후인 지금은 고성능의 안드로이드일수록 인간과 비슷하게 행동하고 충전을 위해 기동을 멈추는 것이 곧 잠을 자는 것이라는 걸 잘 알았기에 정국이 성능이 굉장히 좋은 안드로이드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다. 잠이 많은 사람이 있듯이 잠이 많은 안드로이드도 있겠거니 싶었다.


“정국아.”


토스트에 딸기잼을 바르며 지민이 이번에는 조금 더 큰 소리로 정국을 불렀다. 턱을 괸 채로 졸고 있는 정국이 몸을 작게 움찔 떨었다. 그 모습을 보니 문득 장난을 치고 싶어져서 지민은 토스트를 손에 든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 정국에게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고 있는 정국의 귓가에 숨을 불어넣으며 속삭였다.


“정국아. 안 일어날 거야?”


귓가에서 느껴지는 지민의 숨결에 정국이 놀란 듯 몸을 크게 떨더니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말릴 새도 없이 지민의 허리를 감싸 당겼다. 허리를 굽히고 있던 지민은 그대로 정국의 힘에 끌려 거의 꼬꾸라지다시피 정국의 허벅지 위로 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놀랬잖아!”


고개를 휙 쳐들고 정국을 노려본 지민이 씩씩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국은 아주 평온한 표정으로 지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민은 바닥에 떨어진 토스트와 정국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울상을 짓고는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했다. 지민은 자신의 허리를 단단히 옥죄고 있는 정국의 팔을 멍한 얼굴로 바라봤다. 그러다가 뭐에 홀린 듯 고개를 들자 자신을 빤히 보고 있는 얼굴과 눈이 마주친다.


“뭐, 뭐, 뭐야.”


정국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수하고 예쁜 토끼 같은 얼굴로 지민의 등허리를 쓸어내렸다. 옆구리를 파고드는 손길에 지민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명백한 목적을 띤 손길이었다. 지민은 머릿속에서 울리기 시작하는 경보에 정국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놔라, 어?”

“싫어요.”

“좋은 말로 할 때 놔…악!”


별안간 몸에서 손을 뗀 정국 때문에 버둥거리던 지민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눈앞에 아까 떨어뜨린 토스트가 보이자 지민은 울컥 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허리에 두 손을 얹은 채 제법 무섭게 눈을 치떴다. 원인 제공자인 정국은 지민이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모르겠다는 듯 큰 눈을 축 늘어뜨린 채 입술까지 삐죽이고 있었다.


“너…! 이게 뭐하는 짓이야!”

“형이 놓으라구 했으면서….”


억울하다는 듯 웅얼거리는 정국의 말에 지민은 말문이 막힌 듯 버벅대다가 다시 뻘게진 얼굴로 큰소리쳤다.


“그렇다고 그렇게 막 갑자기 어? 놓으면 어떡해! 떨어지잖아! 아프다고!”

“아팠어요?”


정국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민을 바라봤다. 지민은 정국의 저 얼굴에 약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살피는 정국을 보고 있자니 지민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래, 놓으라고 한 내 입이 잘못했네. 더는 화내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진 토스트를 치우려고 몸을 숙이는데 덥석 허리가 붙잡혔다. 지민이 의아함이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정국이 단정하고 예쁜 얼굴로 가만히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토스트를 치운다는 목적도 잊고 잠시 정국의 얼굴을 감상하던 지민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을 한 채로 야릇하게 자신의 허리와 배를 쓸어오는 손길에 목까지 토마토처럼 빨갛게 물들기 시작하며 발로 정국을 꾹꾹 밀어냈다. 여느 때처럼 정국은 지민이 밀어내는 대로 밀려나 주었다. 토스트를 잽싸게 주워든 지민이 버럭 소리를 지르려던 것을 겨우 참고 타이르는 듯한 말투로 정국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너 왜 그래, 자꾸?”

“뭐가요?”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지민은 한숨을 쉬며 정돈해놓은 머리를 쓸어올렸다. 정국이 억울하다는 얼굴로 지민을 바라봤다.


“그렇게 막…! 막 만지고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왜요?”

“그, 그건….”


지민은 턱 막히는 말문에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지 단어를 고르기 위해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는 사이 정국이 한 발짝 지민에게 다가왔다. 가까워진 거리에 지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치만 형이 먼저 했잖아요!”

“내, 내가 뭘?”


지민은 정말 억울한 얼굴로 정국을 올려다봤다. 정국이 입을 앙다물더니 발로 바닥을 탁탁 치기 시작했다. 갑자기 전세가 역전됐다. 지민은 진짜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생각하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정국이 아예 팔짱까지 낀 채로 지민을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너, 너가 갑자기 막 그렇게 민감한 곳 만지고 그러니까! 놔달라고 한 거잖아! 안 만졌으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났다고!”

“허, 참나.”

“뭐, 뭐?”


지민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마냥 순수하고 아이 같은 정국의 입에서 저런 불량스러운 말이 나왔을 리가 없었다. 따지고 보면 불량스러운 말도 아니었지만, 지민에게는 충격이 큰 태도였다. 씩씩거리며 지민을 바라보던 정국의 얼굴이 이내 붉게 물들더니 급기야 크고 맑은 눈에 눈물까지 맺혔다. 당황한 건 지민이었다. 조금 전까지 씩씩거리던 지민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어쩔 줄 몰라 쩔쩔매며 정국을 달래기 바쁜 모습만 남았다.


“왜 울어? 응?”

“형이 먼저, 먼저 막…귀에 바람불고…그렇게 했으면서! 그래놓구 하지 말라고 뭐라 하고….”


정국을 다독이던 지민이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멍하니 멈췄다. 아. 깨달음의 탄식을 내뱉는 지민을 흘겨본 정국이 흥흥거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잊고 있던 정국의 제작 목적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동생같이 귀엽게만 여기던 동거인이 사실은 만족스럽고 색다른 성생활을 위해 제작된 안드로이드라는 것을 상기할 때마다 지민은 알 수 없는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터덜터덜 자리에 돌아와 앉은 지민은 넋이 나간 채로 떨어진 토스트를 주워놓은 것을 한 입 앙 베어 물었다. 정국이 눈을 크게 뜬 채로 느리게 깜빡였다.


“그거 떨어졌던 거….”


지민은 잽싸게 토스트를 뱉어냈다. 잔해물들과 남은 토스트를 모조리 냉각기와 분쇄기가 달린 음식물 쓰레기통에 넣은 후 따라 놓은 우유를 마시는데 정국이 의아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정국아?”


힘이 없는 지민의 목소리에 정국이 잠시 안쓰러운 표정을 짓더니 해맑은 목소리로 지민에게 물었다.


“형아 근데 오늘 출근 안 해요?”

“헐.”


아침부터 벌어진 한바탕의 소동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 지민은 마시던 우유가 흘러넘칠 정도로 컵을 거칠게 내려놓고는 허둥지둥 거실로 뛰쳐나갔다. 소파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은 가방을 챙겨 들고 현관으로 향하며 아까 쓸어올린다고 엉망이 된 머리를 다시 차분하게 정돈한 지민이 정국에게 물었다.


“정국아, 지금 몇 시야?”

“지금 8시고요. 회사까지 가장 빠른 길은 5분 내로 지하철역에 도착하여 8시 5분에 출발하는 열차를 타는 거예요.”

“그래, 그래. 고맙다! 형 갔다 올게!”


정국의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현관문이 쾅 닫힌다. 정국은 테이블에 앉은 채로 입을 삐죽였다.


“밥도 다 안 먹고 가구….”


정리되지 않은 테이블을 바라보던 정국이 한숨을 푹 쉬며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났다. 열려있는 딸기잼의 뚜껑을 닫고 빵부스러기까지 깔끔하게 정리한 후 정국은 집안을 둘러본 후 푹신한 소파로 가서 몸을 눕혔다. 항상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급히 집을 나가는 모습이 불만이었기에 요 며칠 일찍 일어나 지민을 깨웠더니 지민이 출근하고 나서는 부족한 에너지 충전을 위해 잠을 자야만 했다. 소파에 누워 눈을 감자마자 절전 모드에 들어간 정국은 꿈도 꾸지 않는 단잠에 빠져들었다.

 


*     *     *

 


숨이 찰 때까지 지하철역까지 달려 겨우 8시 5분에 출발하는 열차에 올라탄 지민은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선 채로 숨을 골랐다. 분명 정국이 일찍 깨워주는 것 같은데 항상 간신히 지각을 면하는 것은 어째서인지 변하질 않았다. 뛰어오느라 흐트러진 머리와 옷을 정리하며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던 지민이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어 보였다가 다시 일자로 내리고 꾹 다물었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은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혹시라도 늦을까 초조하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허둥지둥 사무실로 들어가는 것까지도. 간신히 늦지 않고 도착한 지민이 자리에 앉으며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지민씨, 좋은 아침. 하하. 좋은 아침입니다, 대리님. 김 대리의 넉살 좋은 목소리에 웃으며 화답한 지민이 뛰어오느라 삐질 새어 나온 땀을 훔쳤다.

숨을 고르자마자 업무 시간이었다. 입을 헤, 벌린 채 모니터를 바라보던 지민이 하단에 뜨는 메신저 대화창을 멍하니 바라봤다. 아침부터 뭐지? 부리마냥 튀어나온 입술을 우물거리며 대화창을 띄운 지민이 이내 얼굴을 찌푸리며 재빠르게 ESC를 눌러 창을 꺼버렸다.

「오늘 아침 요리킹이 만들어줌. 부럽지?」

같은 회사에서 근무 중인 친구로부터 보기에도 군침이 돌 만한 음식 사진과 함께 온 메시지였다. 지민이 정국을 구매하는 원인이 된 친구는 하루라도 자신의 가사용 안드로이드 요리킹을 자랑하지 않으면 손가락에 가시라도 돋치는지 매일같이 메신저로 지민을 괴롭혔다. 참나, 누군 없는 줄 아나…. 구시렁거리며 업무 관련 창을 띄운 지민은 모니터 하단에 계속해서 올라오는 대화창 팝업에 결국 신경질적으로 팝업 알림을 꺼버렸다.

우리 정국이도 저 정도는 할 수 있거든? 속으로만 씩씩거리던 지민이 키보드를 꾹꾹 누르던 것을 멈췄다. 할 수…있나? 잠시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있던 지민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중에 집에 가서 물어볼 생각이었다.

 

 




오전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점심을 먹자는 팀장의 말에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나서는데 멀리서 재민이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지민은 이대로 백스텝을 밟아 다시 사무실로 돌아갈까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못 본 척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박지민!”


안 들린다. 안 들린다. 주문을 외며 팀원들에게 바짝 붙어서니 옆자리 최미영 씨가 상냥한 미소를 띤 채로 지민의 어깨를 톡톡 치더니 뒤쪽을 가리켜 보였다.


“지민씨, 뒤에서 불러요!”

“아하하…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친절하실 필요는 없는데요…. 속으로 우는 소리를 낸 지민이 삐걱거리는 고개를 돌려 해맑게 손을 흔들고 있는 재민을 노려봤다. 그사이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팀원들을 따라 후다닥 엘리베이터에 오른 지민은 손가락이 부서지게 닫침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성공적으로 문이 닫히나 싶더니 냉큼 달려온 재민에 의해 문이 다시 열린다. 지민은 땅을 바라보며 작게 욕을 내뱉었다. 옆 사람도 듣지 못할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2팀 분들이시네요, 하하!”


붙임성이 좋은 재민의 인사를 팀원들이 반갑게 받아주었다. 이 공간에서 재민이 반갑지 않은 것은 지민뿐인 듯했다.


“너 왜 내 연락 다 씹어?”


지민에게 어깨동무하며 재민이 물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지민이 조용한 엘리베이터에 이를 꽉 문 채로 웃으며 고개를 들어 재민을 바라봤다.


“업무 중이잖아.”

“그렇지. 지민씨 좋은 자세예요.”


팀장의 말에 지민이 어색하게 하하 웃었다. 그러는 사이 엘리베이터는 1층에 도착했다. 자연스럽게 어깨에 둘린 재민의 팔을 떨어뜨린 후 팀원들을 따라가려는데 최미영 씨가 여전히 상냥한 얼굴로 지민을 돌아보며 물었다.


“지민씨 오늘은 재민씨랑 점심 드시나요?”

“예, 예?”


지민이 놀란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재빨리 고개를 저으려는데 재민이 한 발 더 빨랐다.


“예! 오늘은 제가 좀 빌려 가겠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지민이 한쪽 눈썹을 찡그린 채로 재민을 돌아봤다. 아니라고 부정하기 위해 입을 떼는데 팀장이 그대로 쐐기를 박아버렸다.


“그럼 지민씨 식사 맛있게 하고 와요.”


이 상황에서 부정하기도 이상해서 지민은 그냥 입을 다물고 애써 지은 미소와 함께 팀원들을 떠나보냈다. 팀원들이 로비에서 사라지고 나자 지민은 고개를 휙 돌려 재민을 바라봤다.


“뭐야, 갑자기!”

“그러길래 메신저는 왜 씹냐.”

“맨날 요리킹 자랑만 하잖아, 너!”

“그러니까 너도 하나 사라니까? 아주 좋아. 날이 갈수록 요리 실력이 늘고 있어.”


자랑스러운 얼굴의 재민을 바라보던 지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 귀찮아도 이제 메신저는 무시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과 함께였다.


“밥은 뭐 먹을 건데?”


조잘거리는 재민의 말을 막기 위해 지민은 화제를 돌렸다. 그러나 그마저도 소용이 없었다. 요리킹 덕분에 요새 배에 기름칠 자주 해서 가벼운 거로 먹고 싶다는 대답이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어딘가 뿌듯해 보이는 재민을 포기한 얼굴로 쳐다본 지민이 말없이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도착한 곳은 샐러드 위주의 뷔페였다. 팔자에도 없는 초록빛의 점심 메뉴에 지민은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재민은 아예 휴대폰 갤러리까지 꺼내 자랑을 늘어놓는 중이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지민은 결국 참지 못하고 아직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던 자신의 별난 동거인에 대해 꺼내 놓고야 말았다.


“그만해라, 진짜.”

“부러우면 하나 사라니까?”

“나도 있거든?”

“어?”


드디어 재민의 입이 다물어지나 싶었는데 모터를 단 듯 더 빠르게 더 많은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진짜? 언제 샀는데? 모델은? 왜 말 안 했냐?”

“그럼 진짜지 거짓말하겠냐? 산지는 일주일쯤 됐다!”

“와. 대박. 모델은 뭔데?”

“S….”


헙. 무심코 모델명을 말하려던 지민은 입을 꾹 닫았다. 아무리 친구라지만 덜컥 성인용 모델을 샀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물론, 자신이 구매한 것은 아니었지만. 갑자기 입을 다문 지민을 재민이 의아한 얼굴로 바라봤다. 지민은 말없이 샐러드를 입안으로 욱여넣었다.


“뭐, 모델이 그게 그거지….”

“와, 대박이다. 어떻게 한마디도 안 할 수 있냐? 서운하다.”


말하기 좀 그래서 그랬다, 짜샤. 재민에게 전하지 못할 말을 지민은 샐러드와 함께 꼭꼭 씹어 삼켰다.


“이름은? 청소킹으로 했어?”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이름이 요리킹이 뭐냐? 아무리 안드로이드라고 해도 그렇지.”

“요리킹이 뭐 어때서? 원래 다 이름 따라가는 거야. 청소킹으로 하라니까. 청소를 기가 막히게 잘할걸.”


지민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비인간적인 이름을 지어줄 수는 없었다. 지민은 정국을 떠올렸다. 그렇게 예쁜 얼굴에 이름이 청소킹이라니, 있을 수 없어. 백번 생각해도 이름을 청소킹이라고 하지 않은 것은 정말 다행이었다. 눈을 빛내며 구매한 안드로이드 자랑 좀 해보라는 재민의 말에 지민은 셀러리를 오물오물 씹으며 생각했지만 무슨 자랑을 해야 할지 통 감이 오지 않았다.


“음…. 아침에 깨워줘.”

“그건 당연한 거잖아. 그리고 그런 거 치고 너 맨날 출근 시간 아슬아슬하게 오잖아.”

“그건 그런데…. 으음….”

“뭐 요리 같은 거 한 거 없어?”

“요리…?”


지민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지민의 기억 속 정국은 테이블에 앉아서 달랑달랑 다리를 흔들며 밥을 하는 자신을 지켜보는 모습뿐이었다.


“안 시켜봤는데….”

“뭐어?”

“그게 뭐 그렇게 놀랄 일이냐….”


입을 삐죽인 지민이 다른 모습의 정국을 떠올렸다. 퇴근 시간이면 쪼르르 현관에 나와서 마중하는 거? 자신의 옆에 꼭 붙어 자는 거? 뽀뽀해도 되냐면서 답을 하기도 전에 볼에 입을 맞추는 거…? 머리를 긁적인 지민이 무심코 시간을 확인했다가 끝나가는 점심시간에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늦었다. 빨랑 일어나.”


재민을 두고 먼저 성큼성큼 걸어가니 뒤에서 재민이 뒤쫓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     *     *

 


사무실로 돌아온 지민은 급히 회의한다는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회의요…?”


조심스럽게 김 대리에게 물었지만, 그녀도 모른다는 듯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는 것은 다른 팀원들도 마찬가지인 듯 보였다. 다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회의실에 모여 앉았다. 곧 팀장이 들어오자 웅성거리던 소리도 사라졌다. 굳은 표정으로 회의실에 들어온 팀장 때문인지 팀원들도 덩달아 긴장한 듯 굳은 표정이었다. 팀장은 별말 없이 곧바로 화면을 띄웠다. 회의실 안의 모든 시선이 화면으로 향했다. 선명한 화질의 화면에 뜬 것은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손에 꼽히는 안드로이드 제작사의 로고였다. 지민이 정국을 데려온 회사이기도 했다.


“팀에 아주 중요한 프로젝트가 내려왔습니다.”


설마, 하는 마음에 회의실이 술렁였다. 팀장은 탁탁 책상을 두어 번 두드리더니 말을 이었다.


“모르는 분 없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저희 쪽으로 광고 의뢰가 들어왔고 우리 팀이 영광스럽게도 맡게 되었습니다.”


장내가 다시 술렁였다. 지민은 입을 헤 벌리고 화면을 바라봤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세계적인 안드로이드 회사의 광고를 맡게 되는 날이 오다니. 영광스러운 일이고 좋은 기회인 것은 분명했지만, 그만큼 겁이 나기도 했다.


“잘해야 중박, 못하면 쪽박 아닌가요?”


누군가의 말에 다들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웅성거리는 회의실을 둘러본 팀장이 짐짓 엄한 표정으로 다시 책상을 두드렸다.


“좋은 기회입니다. 여러분들 모두 큰 포부를 안고 입사를 하셨지 않습니까? 그걸 이룰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가 찾아왔어요. 겁난다고 기회를 차버리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웅성거리던 소리가 멎었다. 지민은 눈만 이리저리 굴렸다. 그런 원대한 포부 같은 거 가슴에 품어본 적 없었다. 업계에서 첫 번째라는 회사는 아니었지만, 이삼 등을 다투는 회사에 지민은 운이 좋게도 교수의 추천으로 입사할 수 있었다. 맡겨진 일은 열심히 하고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지민이 불안하게 회의실 이곳저곳을 눈으로 훑는 동안 회의는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오늘은 간략하게 프로젝트에 대해 알리기 위한 회의였고 본격적인 프로젝트는 다음 주부터 시작된다는 말을 끝으로 회의는 끝이 났다. 머릿속이 새하얬다. 지민은 멍하니 정신이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회의실에서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혼이 빠져나간 듯해도 한 가지 사실만은 선명했다. 앞으로 지옥 같은 야근의 시작일 거라는 것.

 


*     *     *

 


“다녀왔습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소파에 늘어져 있던 정국이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달려왔다. 형아! 반가움을 잔뜩 담은 목소리에 얼이 빠져 있던 지민이 정신을 차린 듯 정국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오늘 왜 이렇게 힘이 없어요?”


그런 지민의 상태를 보며 정국이 큰 눈을 깜빡이며 걱정스럽게 물어왔다. 지민은 괜찮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신발을 벗고 실내화로 갈아신었다. 그 과정에서 땅을 바라봤던 지민의 시선이 자연스레 다시 정면을 바라보는데 흰 무지 티에 감춰진 정국의 품이 보였다.


“정국아.”

“네?”

“이리 와봐.”


지민이 두 팔을 벌렸다. 정국은 별다른 말 없이 성큼 지민에게 다가와 자신보다 작은 지민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정국의 몸은 따뜻했다. 정말 심장이 뛰는 사람이라고 착각이 들 정도였다. 지민은 가만히 정국의 품에 기댄 채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걱정을 쏟아냈다.


“잘할 수 있을까….”

“…….”


정국은 말없이 지민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이럴 땐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잠시 고민하던 정국이 지민을 자신의 품에서 떼어낸 후 아직 멍한 얼굴을 내려다보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할 수 있어요! 형은 다 잘할 거예요.”

“…….”

“……?”


지민이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자 정국은 이게 아닌가 싶어 큰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정국의 얼굴을 바라보던 지민이 피식 웃는다.


“고맙다. 힘이 나네.”


지민의 말에 정국도 아이같이 웃었다. 정국에게 있어서는 지민의 행복이 곧 자신의 행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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