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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제로 디그리 03

외로움의 정의



주말만큼은 늦잠이 허락되는 날이었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업무에 주중에는 피곤을 달고 사는 지민에게 휴일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동거인은 주말을 지민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주말에 지민이 출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정국은 마치 이날만을 손꼽아 기다려온 듯했다. 오전 10시가 되자마자 무섭게 눈을 번쩍 뜬 정국이 곧바로 죽은 듯이 자는 지민을 흔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깨워도 비몽사몽 한 목소리로 “5분만 더어….”를 중얼거리다 다시 잠들어 버리는 지민의 모습에 정국은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애꿎은 침대만 꾹꾹 누르다 침대에서 일어난 정국이 양 볼 가득 빵빵하게 부풀린 채로 팔짱까지 끼곤 곤히 잠들어 있는 지민을 내려다본다. 그래도 굳게 닫힌 지민의 눈꺼풀은 도무지 올라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큰 눈을 굴리며 잠시 서 있던 정국이 할 일이 사라지자 괜스레 부스럭거리며 방 안을 돌아다녔지만, 돌아다닌다고 할 일이 생긴 것도 아니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지민이 잠들어 있는 침대로 돌아왔다.

평소보다 늦게 일어난 것은 정국도 마찬가지였기에 항상 부족하게 충전되던 날과는 달리 완전히 충전된 상태에서 눈을 떴다. 평소처럼 지민이 출근한 후 낮잠을 자던 때와는 다른 상황에 잠도 오지 않았다. 다시 지민의 옆에 몸을 눕힌 정국은 큰 눈을 깜빡이며 천장만 올려다봤다. 지민이 출근하지 않는 날이기에 지민과 같이 보낼 시간을 내심 기대했는데 기대와 달리 정국은 지금 매우 심심했다. 홀로 멀뚱히 천장만 바라보며 무료함을 달래는 정국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민은 꿈나라에서 헤매느라 정신이 없는 듯 보였다.

정자세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는 것에 질린 정국이 결국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입이 삐죽 튀어나온 채였다.


“치…. 잠만 자고. 형아는 바보야.”


말랑해 보이는 하얀 볼과 앞으로 툭 나온 통통한 입술을 투정 섞인 눈으로 바라보던 정국이 한껏 볼을 부풀렸다. 그러고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발을 까닥이더니 이리저리 굴리던 시선을 입을 살짝 벌린 채 고른 숨을 내뱉고 있는 지민의 얼굴에 고정했다. 정말 단잠에 빠진 듯 평화로워 보이는 지민의 표정이 괜스레 미워 보여서 옆으로 누워있는 지민의 몸 위로 올라탄 정국은 말랑말랑해 보이는 볼을 턱 붙잡았다.


“으헝?”


갑작스럽게 몸 위로 묵직하게 느껴지는 무게와 더불어 볼에 닿아오는 온기에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단잠에 빠져 있던 지민의 눈꺼풀이 천천히 밀려 올라갔다. 정국은 아직 잠에 취해 있는 흐리멍덩한 지민의 눈을 바라보더니 여전히 심술이 난 표정으로 양 손안에 들어온 볼을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으어엉?”


정국의 손 사이에 갇혀 눌린 얼굴로 지민이 무어라 말을 하려고 했지만 온전한 발음이 되지 못하고 알아들을 수 없는 어절들만이 공중에 흩어졌다.


“나빠요, 형.”

“으어, 졍구가 어 어하는 거야?”

“놀아준다고 해놓구선.”


서서히 잠에서 깨어 정신이 돌아온 지민이 정국의 팔을 툭툭 쳐보았지만, 정국은 지민의 볼을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잘 자는 도중에 대체 이게 무슨 봉변인가 싶은 지민이 허우적거리듯 팔을 휘저으며 정국에게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잔뜩 심통이 난 정국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

정국은 버둥거리는 지민을 바라보다가 손바닥을 편 채로 지민의 볼을 누르고 있던 손을 오므리더니 열이 올라 따끈따끈하기까지 한 말랑한 볼을 꾹 잡고는 이번에는 옆으로 당겼다.


“아파!”


지민의 손이 이번엔 제법 매섭게 정국의 손등을 찰싹 때리고 지나갔다. 이번에 정국은 더 고집 피우지 않고 순순히 손을 떼 주었다. 화끈거리는 볼을 문지르며 오래 자서 잔뜩 부은 눈으로 지민이 정국을 노려봤다. 그렇게 퉁퉁 부은 얼굴로 노려봐도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지만, 지민은 제법 심각했다.


“너 자꾸 이렇게 형 자는데 괴롭히면…!”


다시 보내 버린다! 뒷말은 차마 할 수 없어 삼킨 지민이 아직도 얼얼한 볼을 마사지하듯 문질렀다. 정국이 똑똑하고 여린 아이란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뒷말은 하지 못했지만, 어찌 됐든 제대로 경고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지민이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엄한 표정을 짓고 정국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마주한 정국이 입을 앙다문 채 온몸으로 억울함과 함께 자신이 삐졌음을 표출하고 있어 잔소리라도 한바탕 해주겠다는 지민의 기세는 순식간에 꺾여버렸다.


“야, 야, 왜 네가 그렇게 그런 표정으로 있냐…. 화도 못 내게….”


마음 약해진 지민이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끝을 흐리는 동안 정국은 서운함에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참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어야만 했다. 분명 잘 자던 사람을 괴롭힌 것은 정국이었고, 자신은 괴롭힘을 당한 피해자인데 어째서인지 지민은 꼭 자신이 잘못한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번뿐만이 아니라 정국의 눈을 보고 있으면 종종 그랬다. 분명 정국이 만들어진 안드로이드라는 것을 아는데도.


“말해 봐. 응? 왜 그랬어?”


어느새 지민은 아이를 다루는 듯한 말투로 정국을 타이르고 있었다. 입을 꾹 다문 채 시선을 내리깐 채로 앉아 있던 정국은 지민이 엉덩이를 당겨 앉으며 자신에게 가까워지자 그제야 고개를 들어 지민을 바라봐주었다. 자신이 누르고 잡아당기면서 붉어진 지민의 볼을 가만히 보던 정국이 얌전히 놓여 꼼지락거리던 손을 들어 지민의 볼 위에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어찌나 조심스러운지 간지러울 지경인 손길에 퉁퉁 부은 눈을 휘어 접으며 웃던 지민도 질세라 정국의 볼을 감싸 잡았다. 손에 감기는 피부의 감촉이 정말 사람의 것과 같아 지민은 저도 모르게 정국의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말랑말랑한 피부가 느껴졌다. 지민이 자신의 볼을 쪼물거리도록 놔둔 채로 정국은 지민의 볼을 엄지로 조심스럽게 쓸었다. 부스스한 몰골로 서로 볼을 부여잡고 있는 모습이 옆에서 보면 우스운 모양새였지만, 정국과 지민은 서로에게 집중한 것 외에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너 볼 되게 말랑말랑하다.”

“형도요.”


애당초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는 중요치 않다는 듯 지민이 신난 얼굴로 정국이 제게 그랬던 것처럼 정국의 볼을 꾹꾹 눌렀다.


“너 얼굴 지금 되게 웃기다.”

“형뚜 아까 웃겼거등여?”


히히히. 반죽하듯 정국의 볼을 눌렀다 당기기를 반복하던 지민은 얼마 지나지 않아 빨갛게 물들기 시작한 정국의 피부에 놀라 손을 놓았다.


“아파?”

“…아니요.”


걱정 가득한 지민의 얼굴이 자신을 살피는 것은 좋았지만, 거짓말을 할 자신은 없었기에 정국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사람과 비슷한 피부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진짜 사람은 아니었다. 아픔을 느낄 수 있을 리 없었다. 통각은 안드로이드에게 불필요한 기능이다.

아프지 않다는 말에도 걱정 섞인 눈으로 붉어진 볼을 바라보며 연신 정국의 볼을 쓸어내리던 지민이 문득 생각이 난다는 듯 물었다.


“그래서, 정국이. 왜 그랬어?”


지민의 손길을 얌전히 받고 있던 정국이 손을 무릎 위로 가져와 가지런히 모은 후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중간중간 입을 삐죽이기도 했다. 지민은 차분하게 정국을 기다려주었다. 하얀 볼을 주물럭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은 채로.


“형이 자꾸 잠만 자고….”


눈을 도르륵 굴리던 정국이 입을 삐죽이며 툭 던지듯 내뱉은 말에 지민은 한 손은 여전히 정국의 볼을 만지작거리며 한 손으론 부스스한 머리를 마구 헝클리듯 쓰다듬었다.


“그래서 삐졌구나? 근데 형이 너무 피곤해서 그래. 맨날 일하고 늦잠잘 수 있는 유일한 날인데….”

“…그건 아는데….”


굴러다니던 정국의 눈동자가 다시 아래를 향했다. 시선을 내리깐 채로 우물거리는 붉은 입술을 바라보던 지민이 말해보라는 듯 정국을 토닥였지만, 풀칠이라도 한 듯 정국의 입술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지민이 바쁘고 피곤하다는 사실 정도는 정국도 알고 있었다. 근래에는 무슨 일인지 얼굴에 그늘이 지고 한숨이 늘어나기까지 한 지민이란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렇지만. 자꾸 삐죽삐죽 솟아 나오는 서운함은 어쩔 수 없었다. 종일 같이 있을 수 있는 날인데 자기 마음도 몰라주고 잠만 자는 지민이 아주 조금, 정말 딱 새끼손톱의 반만큼 밉기도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치만 혼자 있으면 외로운데….”


외로웠다. 이런 감정을 무어라 정의를 내려야 할지 정국은 꽤 오랜 시간을 고민해왔다. 지민과 처음 만난 날 이후 홀로 남은 집에서 느끼는 가슴 한쪽이 텅 비어버린 듯한 감정에 대해 고민했고, 긴 고민 끝에 이 공허함을 뭐라고 부르는지에 대해 알아냈다. 외로움. 외로움이었다.

지민은 심심해서 그랬다는 대답 정도를 기대하다 생각지도 못한 정국의 말에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멍해졌다. 외로울 거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못했다. 홀로 남은 텅 빈 집이 주는 외로움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나 보다. 지민은 고개를 푹 숙였다. 외롭지 않기 위해 데려온 존재에게 똑같이 그 외로움을 안겨주고 있었다는 사실이 지민을 쿡쿡 찔러왔다. 정국을 데려오며 외로움이 해소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외로움을 떠넘겼을 뿐이었다.

정국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지민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살폈다. 역시 괜한 말을 했다. 그냥 혼자 삼키고 말걸. 정국은 조금 전 자신이 했던 말을 후회했다. 안드로이드면서 주제넘은 말을 해버린 걸까. 이런 걸 기대하고 자신을 구매했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자 정국은 조금 초조해졌다. 내가 필요 없어졌으면 어떡하지. 큰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리며 지민을 바라봤다.


“그냥 못 들은 거로….”

“정국아.”


말을 자르고 들어오는 지민의 목소리에 정국의 얼굴이 빳빳하게 굳어갔다. 뭔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할 말은 많은데 정작 입은 떨어지지 않는다. 정국이 초조하게 입술을 꽉 깨무는 동안 지민은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자고 일어나 부스스해진 머리를 쓸어 올렸다. 정국은 꼭 그 짧은 동작이 열 배로 늘려놓기라도 한 듯 길게 느껴졌다.


“미안해.”

“…네?”


긴장했던 것이 무색하도록 지민의 입에서 나온 건 미안하다는 말이었다. 정국은 자신이 너무 듣고 싶은 나머지 입력 기관이 오류를 일으켰나 싶어 멍하니 지민의 말을 곱씹었다.


“혼자 있어서 그랬구나.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진심으로 미안함이 뚝뚝 묻어나오는 목소리였다. 외로움은 같이 나누어야 사라지는 건데. 왜 그 간단한 걸 잊고 있었을까. 입술을 오물거리며 할 말을 찾던 지민은 말 대신 온기로 마음을 전하기를 택했다. 팔을 활짝 열고 기다리자 머뭇거리던 정국이 품에 안겨 왔다. 사실 정국의 몸집이 더 컸기에 지민이 정국의 품에 안기는 꼴이었다. 정국은 힘주어 지민의 몸을 끌어안았다. 맞닿은 가슴에선 심장 박동 소리가 났다. 자신에겐 없는 것이었다.


“형 심장이….”


귀 끝까지 열이 오르는 듯한 감각과 함께 공허함이 찾아왔다. 물과 기름처럼 둥둥 뜬 감정이 만나 생겨난 소용돌이에 빠진 것만 같았다. 정국은 입술을 꽉 물었다가 놓으며 거센 소용돌이를 삼켜냈다.


“평소보다 빨리 뛰어요. 아픈 거 아니에요?”


자신에게도 심장이 있었으면 지금 빨리 뛰었을까? 정국은 아직 귀 끝까지 열이 올라 발갛게 물드는 것과 심장이 빨리 뛰는 것에 대한 상관관계를 알지 못했다. 다만, 마주 본 지민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었기에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었다.


“아, 아니야! 네가 너무 세게 안아서 숨이 막혀서, 그래서 그래.”


지민은 어딘가 안절부절못하는 모양새로 마치 변명을 늘어놓듯 말꼬리를 늘였다. 정국은 ‘숨도 못 쉴 정도로 그렇게 세게 안았나?’를 고민하며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 어떻든 상관없었다. 지민이 그렇다면 그런 거였으니까.

지민은 멋대로 쿵쾅거리는 심장을 할 수만 있다면 주먹으로 쾅쾅 내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뭔데, 왜 주인 허락도 안 받고 멋대로 뛰는 건데? 그러나 애석하게도 심장은 답이 없었다. 그 대신 그냥 정국의 따뜻한 품이 눈물 나게 다정해서 그런 거라고 머리가 말했다. 텅 빈 집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기다리는 존재는 체온까지도 따뜻했기에 조금 혼란스러운 거라고.


“뭐, 뭐 하고 놀까?”


지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정국은 크고 맑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지민을 바라봤다. 어째서인지 꼭 터지기 직전의 폭탄을 눈앞에 두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런 지민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국은 정말 뭐 하고 놀지에 대해 찬찬히 고민하기라도 하는 듯 큰 눈만 굴릴 뿐이었다.


“으음….”


달싹이는 자신의 입술을 지민이 긴장한 얼굴로 바라보는 것도 모른 채 신중하게 고민하던 정국이 토끼 같은 앞니를 내보이며 해사한 얼굴로 웃었다.


“그냥 이렇게 형아랑 안고만 있어도 좋은걸요!”


쿵. 어디선가 심장이 내려앉는 소리가 났다. 지민은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린 채로 어색하게 웃었다. 귀엽고 예쁜 얼굴에 약한 지민에게 정국은 치명적인 존재였다. 자신의 취향에 맞게 완벽히 커스텀 된 안드로이드라는 걸 알고 있는데도 어째서인지 정국을 보고 있으면 자꾸 사람같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지금이 그랬다. 꿈에서만 그리던 귀여운 남동생의 모습이 정국에게서 보였다.


“그럼 일단 밥부터 먹을까?”


그래서 덜컥 밥부터 먹자고 해버렸다. 정국이 밥을 먹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그러나 정국은 지민이 아차 할 새도 없이 빙글빙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아요!”

 



*   *   *

 



지민은 평소의 주말과 다를 것 없이 자그마한 부엌을 오가며 간단한 브런치를 만들기 시작했다. 뒤에 자기보다 큰 덩치의 안드로이드를 매달고 있는 것 빼곤 평소와 다를 것이 없는 모양새였다. 묵직한 무게감을 뒤에 붙인 채로 움직이는 일이 편치 않았지만, 씻고 나오기 무섭게 와락 달려든 정국이 계속 자신의 허리를 꽉 붙잡은 채 떨어질 줄을 몰랐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무엇보다도 지민 자신이 꽉 붙어 있는 정국이 나쁘지 않았다.

정국은 막 씻고 나온 지민의 살 냄새를 맡으며 지민이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혼자 산 지 오래된 지민은 그럭저럭 모양새를 갖춘 요리를 할 줄 알았는데 작고 야무진 손에서 만들어지는 음식들을 정국이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매일 빵 쪼가리를, 그마저도 먹지 못하는 날이 태반이었다, 허겁지겁 입에 넣고 출근하던 사람과는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베이컨을 굽고 샐러드를 만든 지민이 마지막으로 올리브유 드레싱을 뿌리려다 멈칫하곤 정국을 돌아봤다. 호기심이 가득한 눈동자가 시선을 느끼곤 지민에게로 향했다. 왜요?


“…어, 음. 지금 뭐 하는 장면이야?”

“백허그요.”


정말 몰라서 물어요? 땡그랗게 떠진 눈이 그렇게 묻는 것 같았다. 아니, 그건 아는데…. 지민은 말꼬리를 지익 잡아 늘이다 그냥 입을 닫았다. 요상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대신 지민은 낑낑거리며 몸을 돌려 결 좋은 정국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꼭 예쁜 동생이 생긴 것 같아 기뻐.”


정국의 눈동자에 파도가 일었다. 잔잔한 수면에 던져진 폭탄은 수면 아래에서 폭발한다. 다음 순간 정국은 지민의 갈비뼈를 으스러뜨리기라도 할 작정인지 있는 힘껏 작은 몸을 꽉 끌어안았다.


“저도요. 너무 기뻐요.”


귓가에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였다. 자신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있는 정국의 얼굴을 볼 순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발갛게 물들었을 하얀 얼굴이 상상이 가기도 했다. 탄탄한 등을 토닥이고 있는데 스치듯 흘려보냈던 정국의 말이 불현듯 지민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오래전부터 형이 있었으면 했어요.


토닥임을 멈춘 지민이 정국의 팔뚝을 쿡쿡 찌르자 정국이 꽉 안았던 팔을 풀어냈다. 조금 빨개진 정국의 코끝을 바라보며 푸스스 웃은 지민이 정국의 붕 뜬 앞머리를 다정한 손길로 정돈해주었다.


내가 너의 좋은 형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말로 전하지 못한 말은 지민의 마음속에서만 울려 퍼졌다. 정국은 자신의 눈을 빤히 바라보고 빙그레 웃는 지민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다. 왜요? 물어오는 말에도 지민은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나 밥 먹을래.”

“그래요.”


지민의 말에 정국은 지민의 아직 지민의 골반 부근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었다. 지민은 이미 만들어서 접시에까지 담아놓은 음식들을 식탁으로 날랐다. 비스듬히 선 채로 지민을 바라보던 정국이 찬장에서 컵을 꺼내 넘치기 직전까지 물을 받은 후 지민의 앞에 놓아주었다.

평화로운 주말의 늦은 아침은 식어버린 베이컨과 숨이 죽은 샐러드였지만, 마주 앉은 채 두 손으로 볼을 감싸 턱을 괴고 토끼 같은 앞니를 내보이며 웃고 있는 정국을 보고 있으니 10첩 반상 부럽지 않은 만족스러운 식사가 되었다.

 

 



부른 배를 통통 두드리며 일어나는데 정국이 쏜살같이 튀어나와 손에 들린 빈 그릇을 뺏어갔다. 지민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순식간에 텅 빈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거는…무슨 장면일까, 정국아?”


갑작스러운 정국의 행동에 지민이 묻자 그릇을 무사히 싱크대에 운반한 정국이 몸을 휙 돌려 지민을 바라봤다. 요즘 안드로이드들은 다 눈으로 텔레파시를 쏘는 기능이라도 탑재하고 나오는 걸까. 말없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정국의 시선에 지민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정국은 그런 지민이 답답하기라도 한 듯 휴, 하고 한숨을 내쉬어서 지민의 표정은 곧 황당함으로 바뀌었다.


“설거지!”

“으응?”

“설거지 한다구요.”

“설거지? 네가?”

“아이참.”


지민의 눈빛에 찰나의 순간 스쳐 지나간 불신을 읽은 건지 정국이 발을 쿵쿵 구르더니 남은 그릇을 몽땅 챙겨 싱크대로 향했다. 지민이 안절부절못하며 그 뒤를 따르자 무사히 그릇을 내려놓은 정국이 뾰로통한 표정을 한 채 지민과 눈을 맞춰왔다.


“제가 할 거니까 형은 가서 잠이나 더 자세요.”

“괜찮아. 내가 해도 되는데….”

“아이, 진짜. 이게 내가 해야 하는 일이잖아요.”

“아…뭐, 그렇긴 하지…?”


원래의 구매 목적은 밥과 설거지를 비롯한 가사 전반이었으니 정국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실제로 배송이 온 정국은 다른 목적을 띤 채 만들어진 안드로이드였고, 그 사항을 제외하더라도 지민은 정국이 설거지하게 두는 것이 어딘가 마음에 걸렸다.

머리를 긁적이며 서 있는 지민의 등을 떠민 정국이 나만 믿으라며 가슴을 펴고 떵떵거리는 소리로 말하는데 그 표정이 제법 자신이 있어 보여서 지민은 거실로 쫓겨나듯 나와야 했다. 정국이 하고 싶어 하니 일단 물러나긴 했지만, 마음이 놓이지는 않았는지 지민은 차마 부엌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거실과 부엌 언저리에 어정쩡하게 선 채로 “정국아, 따뜻한 물로 해!”라거나 “장갑 꼭 끼고!” 같은 말을 외쳐댔다. 그럴 때마다 돌아오는 것은 “아이참! 알겠다구요!”라는 대답이었다.

 

 



지민의 걱정과는 달리 아주 무사히 설거지를 마친 정국이 뿌듯한 표정으로 부엌에서 걸어 나왔다. 소파에 앉은 채 TV를 틀어놓긴 했지만, 모든 신경이 부엌으로 쏠려 있던 지민이 튕겨나듯 일어나 정국을 맞았다. 한 가지 도전 과제를 해냈다는 표정의 정국을 보니 절로 광대가 솟구치고 입꼬리엔 흐뭇한 미소가 만발했다.


“오구, 잘했어.”

“그것 봐요. 할 수 있다니까?”


아예 팔짱까지 낀 채로 서서 거들먹거리는 정국이 귀여워서 지민은 빵실한 엉덩이를 두 번 토닥여준 후 머리까지 슥슥 쓰다듬어 주었다. 지민의 칭찬에 기분이 좋았는지 정국은 토끼 앞니를 내놓고 웃어 보이더니 자연스럽게 지민의 허리를 감아 끌어당겼다.


“이제 뭐 할까요?”

“어?”

“형 밥도 다 먹었으니까요.”

“그, 그렇지. 뭐 하고 놀면 좋을까?”


또 정국에게 물었다가 ‘이대로 꼭 껴안고 있어요!’라는 답이 돌아올까 무서워진 지민은 근래 가장 빠른 속도로 머리를 굴렸다. 저번 주말에는 뭘 했더라? 곰곰이 생각해봐도 답은 하나였다.


“TV 볼까?”


정국이 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소파로 정국을 이끌어 앉힌 후 TV의 전원을 켰다. 한창 잘 나간다는 드라마의 재방송이 흘러나오고 있는 참이었다. 무슨 상황인지 주인공들이 마구 다투고 있었다. 평소 드라마를 챙겨 보는 편이 아닌 지민은 TV 속 화면에 영 집중을 하지 못했다. 두 주인공이 왜 싸우고 있는지도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초점 없는 눈으로 화면을 바라보던 지민은 어느 순간부터 말이 없어진 정국에 슬쩍 곁눈질로 옆을 살폈다. 드라마에 흥미가 없는 지민에 비해 정국은 재미가 있는지 화면에 집중한 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있었다.

관심 없는 드라마보다는 그런 정국을 지켜보는 게 더 재밌었기에 지민은 아예 대놓고 고개를 돌려 정국을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화면 속 두 주인공의 행동에 따라 미세하게 변하는 얼굴이 재밌었다. 화가 난 여자가 결국 남자의 뺨을 때리는 순간에는 작게 ‘오.’하고 감탄사까지 내뱉었다. 찰진 소리와 함께 돌아가는 남자의 얼굴에 입을 헤, 벌린 정국의 얼굴이 웃겨 지민은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제야 TV의 화면에 고정되었던 정국의 시선이 지민에게로 향했다.


“아하하…. 아니, 그냥 너 표정이 웃겨서.”


정국의 얼굴이 왜 웃냐는 표정이었기에 지민은 눈꼬리에 고인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지민의 웃는 얼굴을 잠시 가만히 바라보던 정국이 지민이 웃음을 멈출 때 즘이 되자 요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으하하, 너 뭐 하는 거야? 지민의 웃음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정국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TV 화면을 바라봤다. 옆에서 지민이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내 얼굴이 그렇게 이상했나?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지민이 웃었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지민이 웃음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는 동안 정국은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드라마를 시청했다. 싸우고 난 후 연인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괴로워하고 사과를 하려다 멈칫하고 다시 또 후회하고 사과를 하려다 멈칫하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지민이 보기에는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짐짓 유치하기까지 한 내용이었지만, 드라마를 처음 본 정국에겐 그게 아닌지 화면을 바라보는 얼굴이 제법 심각하기까지 했다.

굳이 화면을 보지 않아도 정국을 보는 것만으로 드라마가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지민은 턱을 괸 채로 정국을 바라보다 가끔 화면으로 시선을 던졌다.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전개였다. 저러다 다시 만나서 화해하고 뜨거운 키스 좀 해주고 그러겠지, 뭐. 하품을 작게 하며 정국의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지민은 생각했다. 그리고 역시 지민의 예상과 다를 것 없는 내용이 이어졌다.

평소라면 ‘저런 드라마를 대체 왜 보는 거야?’라며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본 얼굴로 TV를 끄거나 채널을 돌렸을 지민이 잠자코 있는 이유는 오로지 정국 때문이었다. 두 주인공이 다시 만나는 장면에서는 주먹을 불끈 쥐고 응원을 하는가 하면 화해하는 순간에는 마치 좋아하는 축구팀이 선제골을 넣는 장면이라도 본 듯 벌떡 일어나 깡충깡충 뛰어다닐 정도였다.


“재밌었어?”

“네!”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정국이 곁눈질로 화면을 바라보다 뭘 봤는지 입을 작게 벌리곤 아예 시선을 화면으로 돌렸다. 의아한 표정으로 정국을 따라 화면을 바라보던 지민도 곧 정국과 같은 표정이 되었다. 지민이 예상했던 시나리오의 마지막 장면. 진한 키스신이 나오고 있었다.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구도와 소리 때문에 보는 사람의 얼굴이 화끈해질 정도였다. 이, 이런 거 보지 마! 저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없는 말이었지만 지민은 정국의 눈을 가리며 그렇게 말하곤 황급히 리모컨을 찾아 TV를 꺼버렸다.

거실에는 정적만 남았다. 급한 나머지 정국의 눈을 누르듯 가린 손바닥에 긴 속눈썹이 닿아 간질거리는 감촉이 느껴지자 지민은 감전된 사람 마냥 화들짝 놀라 손을 떼어냈다. 정국이 어딘가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까지 들릴 정적만으로도 숨이 막힐 것 같은데 저를 바라보는 정국의 맑은 눈이나 붉은 입술이 자꾸 눈에 들어오자 지민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허허, 더, 덥다.”

“더워요? 얼굴이 빨개요.”

“아, 아냐. 생각해보니까 그렇게 덥진 않아…!”


이게 무슨 유난이람. 정작 정국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괜히 혼자 의식하는 것 같아 민망해진 지민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슬그머니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정국은 그런 지민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정말 어디 아픈가 싶은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니 지민이 몸을 움찔하더니 슬쩍 피한다. 입꼬리를 내리고 입을 뚱하니 내민 정국이 지민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를 생각하듯 가만히 앉아 있더니 알아냈다는 듯 박수를 한 번 치곤 해맑은 얼굴로 지민에게 말했다.


“형 지금 부끄러운 거죠?”


방대한 데이터에서 찾아낸 결과물이 스스로 만족스러운 듯 뿌듯한 표정이었다. 정곡을 찌르는 정국의 말에 지민이 화들짝 놀라는가 싶더니 애써 태연한 척 대답했다.


“아니야! 큼. 그냥, 그냥 그런 거니까 그렇게 알아.”

“그냥 그런 게 뭔데요?”

“있어, 그런 게!”

“형 혹시….”


정국이 눈을 가늘게 뜨고 지민을 바라봤다. 뭐, 뭐야. 왜 그렇게 봐? 옆에서 느껴지는 정국의 시선 속에서 불길함을 느낀 지민이 힐끔힐끔 정국을 돌아봤다. 정국은 이번엔 정말 정답일 거라 확신에 찬 얼굴을 하곤 지민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하고 싶어서 그렇죠?”

“어엉?”


뭐가 하고 싶어? 생각지도 못한 말을 이해하기 위해 지민이 잠시 멈춰 있는 사이 정국이 잡았던 손을 놓고 이번엔 얼굴을 붙잡아온다.


“뭐, 뭐야?”

“키스하고 싶은 거 아니에요? 나 잘 할 수 있어요!”

“뭐? 무슨 소리 하는 읍…!”


지민의 말은 정국의 입안으로 먹혀들어 갔다. 그리고 지민은 다시 한번 정국의 제작 목적을 몸소 깨달아야 했다. 빈말은 아니었는지 정국은 정말 잘했다. 키스를. 그것도 아주 잘.

 



*   *   *

 



사람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아찔하고 황홀했던 키스가 끝난 후 얼굴이 터질 것처럼 달아올라 색색 숨을 몰아쉬는 지민에 비해 낯빛 하나 변하지 않은 정국은 예의 반짝거리는 얼굴로 말했다. TV를 봐도 되겠냐고. 오 분 여간 이어진 키스에 하마터면 아래까지 세울 뻔했던 지민은 어딘가로부터 밀려오는 배신감에 입을 벌린 채 파들파들 떨다가 이내 정국의 손에 리모컨을 넘겨주고 말았다.

그게 벌써 이틀 전 이야기였다. 지민은 몽롱한 얼굴로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의 바탕화면을 바라봤다. 하루아침에 머릿속이 텅 비어버리기라도 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지민은 정국과 처음 키스를 한 이후로 주말 동안 총 세 번의 키스를 더 했고, 퉁퉁 부르튼 입술로 정신을 차렸을 땐 주말이 끝나있었다.

의미 없는 클릭을 반복하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 지민의 머릿속에 살고 있던 악마가 속삭이듯 말을 걸어왔다. 빨간 경보음과 함께. 예쁜 동생 같다며. 형제끼리는 키스 안 해. 그러자 반대쪽에서 나타난 천사가 앙칼진 목소리로 반박한다. 진짜 동생도 아니잖아? 악마가 다시 말한다. 형이 가지고 싶었다던 순진한 얼굴을 생각해봐! 이번에는 천사가 콧방귀를 낀다. 어차피 그런 목적으로 제작된 거잖아?

으아악! 차마 사무실에서 소리를 지를 용기는 없었기에 속으로 울분을 토해내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지민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상하게 역할이 바뀐 것 같은 천사와 악마는 계속해서 지민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떠들어댔고 지민은 살짝 벌린 입으로 혼이 빠져나가는 경험을 체험 중이었다. 시끄러워, 너희 둘 다 조용히 해. 정국이는 그냥 정국이야! 참다못한 지민이 머릿속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천사와 악마는 조용히 입을 삐죽이며 사라졌다.


“지민 씨…?”


씩씩거리며 마우스를 쥔 손을 떨고 있는데 옆자리 최미영 씨가 상냥한 목소리로 지민을 조심스레 불렀다. 지민은 화들짝 놀라 눈은 동그랗게 키우고 몸은 움츠린 채 미영을 바라봤다. 미영은 지민의 반응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긴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무슨 일 있으세요?”

“네? 아니요.”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오는 친절한 목소리에 지민은 고개까지 저어가며 부인했다. 그런 지민을 보며 빙그레 웃어 보인 미영이 너스레를 떨며 품에 안고 있던 자료들을 지민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하도 넋이 나간 표정으로 계시길래. 집에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었죠.”

“아….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괜찮아요, 아무 일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아하하…. 이건 뭐죠?”


어색한 분위기에 지민이 미영이 내려놓은 자료들을 가리켰다. 종이뭉치와 책들이 엉망으로 섞여 있는 모양새가 영 불길했다. 아! 미영이 작은 탄성과 함께 꺼낸 말에 지민의 복잡했던 머릿속이 온통 새하얗게 변하더니 백지가 되어버렸다.


“이거 저희 프로젝트랑 관련한 자료인데 지민 씨가 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네?”

“여기에 안드로이드 회사들의 과거 광고들이랑 또 안드로이드 자체에 관한 책들이랑 이것저것 섞여 있어요.”

“그걸…지금 저보고 다 보란 말씀이신…거죠?”

“네, 그렇죠.”

“그냥 보기만 합니까? 아니면 뭐 다른 게….”


지민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미영은 조금 곤란한 듯 입술을 얕게 물었다가 놓으며 조금 측은한 시선을 지민에게 보내왔다. 지민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보지 마십쇼. 그런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미영이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지민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토닥 두드렸다.


“아무래도 안드로이드 관련 광고 의뢰가 들어온 것은 처음이라서 기존 안드로이드 광고들에 대한 정보와 또, 광고를 만들어야 할 제품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보니까….”


미영이 말끝을 흐리며 지민의 안색을 살폈다. 하얗던 얼굴이 더 허옇게 뜬 모양새였다. 그 모습이 퍽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었고, 지민이 하지 않았을 때 그 몫이 누구에게 돌아올지는 너무 뻔한 일이었기에.


“아무튼, 그렇게 됐어요. 부탁해요, 지민 씨. 자료들 잘 정리하고 간추려서 브리핑하면 될 거예요.”

“…….”


지민의 벌어진 입이 다물어질 줄 몰랐다. 가장 귀찮고 성가시면서도 필요한 작업 중 하나였고 그 일을 맡게 된 지민은 가만히 있다가 벼락 맞은 것 같은 심정이었다. 더 보고 있기 미안해진 미영이 그럼 고생하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로 돌아가고 홀로 남겨진 지민은 텅 빈 눈동자로 산처럼 쌓인 자료들을 바라봤다. 신명 나게 싸우던 머릿속의 천사와 악마도 조용히 입을 다물고 한마음 한뜻으로 지민을 측은하게 바라봤다. 그렇게 보지 마. 지민은 고개를 빠르게 휘저어 잡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노력했다.

으, 이럴 때가 아니지! 지민은 두 손으로 자신의 뺨을 가볍게 찰싹찰싹 때렸다. 산처럼 쌓인 일을 끝마치기 위해선 눈이 빠지라 자료를 들여다봐도 야근을 불사할 판이었다. 심호흡을 한 번 한 지민이 엉망으로 섞인 자료들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   *   *

 



자료 분류를 끝내고 기존 광고들에 대한 정보를 훑고 나니 벌써 아홉 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었다. 책상 앞에 딱 달라붙어 웅크렸던 몸이 아우성이었다. 끙. 기지개를 한 번 펴고 시간을 확인한 지민의 눈이 두 배로 커졌다. 정국의 말간 얼굴이 떠올랐다.


“아, 안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지민이 다급하게 자리를 정리하고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외로움을 떠넘기지 않겠다고 다짐한 지 얼마나 됐다고. 다 보지 못한 종이 뭉치를 대충 가방에 쑤셔 넣었다. 앞뒤로 꾸벅꾸벅 인사를 한 지민이 차마 실내에서 뛰지는 못하고 잰걸음으로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초조한 얼굴로 가방끈을 만지작거리던 지민은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마자 뛰어들어가 1층 버튼을 누르고선 닫힘 버튼을 연타했다. 오늘따라 더 느릿느릿 닫히는 것 같은 문이 원망스러웠다. 하나씩 줄어가는 숫자를 지켜보던 지민은 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마자 발바닥에 추진기를 붙인 사람 마냥 튀어나갔다.

밖은 이미 밤이 가득 내려앉아 있었다. 지민은 쉬지 않고 지하철역까지 달렸다. 서둘러 지하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에 발을 디디려는데 시야의 끝에 무언가 걸렸다. 지민은 발길을 돌려 그 앞으로 다가갔다. 유리문 안에는 인형들이 진열되어있었다. 지민은 자신의 품보다 조금 작은 토끼 인형에 시선을 고정했다. 빤히 인형을 바라보던 지민이 홀린 듯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저기, 저 토끼 인형 포장해주세요.”


지민이 가리킨 토끼 인형을 들고 온 점원이 리본을 둘둘 두르고 포장을 하며 밝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애인 선물 사시나 봐요!”

“아. 아뇨. 동생이요.”

“그렇구나. 다정하시네요.”

“감사합니다. 결제는 이걸로…. 아, 잠시만요.”


포장을 마치고 계산을 하려던 지민이 빠른 걸음으로 가게 한쪽에 진열된 문구류 판매대 앞에 멈춰섰다. 판매대를 훑어보던 지민이 깔끔한 디자인의 다이어리를 집어 들었다.


“이것도 같이 계산해주세요.”

“네, 잠시만요…. 결제 완료됐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감사합니다.”


포장된 인형과 다이어리를 받아든 지민이 다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인형을 구매한 것은 어디까지나 충동적인 결정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흐뭇한 얼굴로 품에 포장된 인형을 꼭 안은 채 정국이 좋아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내려야 할 역이었다.

 



*   *   *

 



“정국아!”


문을 열어젖히자 조용한 집안이 눈에 들어왔다. 지민은 집까지 뛰어오느라 헉헉거리는 숨을 고르며 신발을 벗어 던졌다. 벌써 자나? 아무도 없는 것처럼 고요했다. 지민은 불이 꺼진 집 안으로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정국아?”


불러도 답이 없었다. 이상하다. 집에 돌아올 때마다 항상 현관으로 마중 나오던 정국이었는데. 지민은 고개를 갸웃하며 거실 불을 켜고 돌아섰다가 심장이 그대로 철렁 내려앉는 줄 알았다.


“악!”


정국이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놀라서 벌렁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킨 후 지민은 정국에게 다가갔다.


“왜 이러고 있어. 불도 안 켜고.”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앞만 바라보고 있던 정국이 스륵 고개를 들어 지민을 바라봤다. 새까만 눈동자가 오늘따라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정국에 지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형 얼굴에 뭐 묻었어?”

“…안 오는 줄 알았어요.”

“응?”

“형이 이대로 돌아오지 않는 줄 알았다고요.”

“…정국아.”


고개를 숙이고 입을 삐죽이는 정국을 본 지민이 금세 울상이 된 얼굴로 무릎을 굽혀 몸을 낮춘 후 정국과 시선을 맞췄다.


“미안해. 일이 너무 많아서…. 형이 이렇게 예쁜 정국이 두고 어딜 가겠어.”


정국이 고개를 들어 지민을 바라본다. 지민은 헤헤 웃으며 품에 소중히 안고 온 인형을 꺼내 들었다.


“짠. 선물.”


정국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지민이 내미는 인형을 받아들었다. 그러고는 이게 뭐냐는 얼굴로 지민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오다가 정국이 생각나서 샀어. 늦은 거에 대해 사과도 할 겸.”


열어보라는 듯 지민이 고갯짓을 하자 정국이 부스럭거리며 포장을 뜯었다. 토끼 인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와. 정국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처음 받아보는 선물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물론, 실제로 두근거리지는 않았지만, 인간으로 치면 그런 감정을 느끼는 중이었다.


“이거 제 거예요?”

“응. 선물이니까. 닮은 건 널 닮긴 했지만, 나라고 생각해! 나 없는 동안 같이 놀아줘.”

“…….”


정국이 살짝 유치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봤지만, 지민은 못 본 척하며 꿋꿋이 말을 이었다.


“이름도 지어주고 그래. 앞으로…좀 늦게 올 것 같으니까.”

“늦게요?”

“응…. 프로젝트를 시작해서…, 그래도 최대한 빨리 와볼게.”

“괜찮아요.”

“응?”

“괜찮다고요. 기다릴게요.”

“정국아….”


며칠 사이에 훌쩍 자란 동생을 보는 기분에 지민은 살짝 감동한 얼굴을 했다. 그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정국이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왜 웃어?”

“형 얼굴 웃겨서요.”

“우씨, 너.”

“그리고 저는 애가 아니지만, 형이 절 그렇게 여긴다면 그렇다고 할게요.”


허. 당돌한 말에 지민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피식 웃었다. 안절부절못하며 집에 왔던 순간들이 허탈에 다리에 힘이 빠진 지민이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괜찮아요? 머리 위로 정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 지민이 이번엔 다이어리를 꺼내 들었다. 정국의 의문 섞인 시선이 따라왔다.


“그건 뭐예요?”

“집에 혼자 있으면 심심하니까 일기라도 쓰라고.”


정국이 ‘나는 지금 싫지만 대놓고 싫은 티를 내지 못한다.’라고 쓰인 오묘한 표정을 짓고 지민과 다이어리를 번갈아 봤다. 씨, 남은 생각해서 사 왔더니. 불만스럽게 중얼거린 지민이 다이어리도 정국의 품에 안겨주었다.


“너 혼자만 쓰는 거 싫으면 나도 쓸게.”

“네?”

“같이 쓰자고, 일기. 교환일기 몰라?”


정국이 눈을 도르르 굴리더니 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매일 일기 써 놔. 나도 갔다 와서 쓸게.”

“알겠어요.”


정국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일기를 쓰는 건 싫었지만, 지민과 교환일기를 쓰는 거라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선물을 다 전달한 지민이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씻고 나와서 다 보지 못한 자료를 읽어봐야 했다.

씻겠다며 욕실로 사라지는 지민을 바라보던 정국이 하품을 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씻고 난 후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나온 지민은 아무도 없는 거실에 현관에 던져둔 가방을 챙겨 방 안으로 들어갔다. 정국이 침대에 누운 채 눈을 감고 있었다. 품엔 토끼 인형을 안은 채였다. 아, 귀여워. 흐뭇한 미소를 얼굴 가득 띄운 지민이 가방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책상 앞에 앉았다. 종일 활자만 읽었더니 글자가 눈앞에 둥둥 떠다니며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심지어 그 옆에 토끼 인형을 안은 정국까지 떠다녀서 더 집중하지 못하게 지민을 괴롭혔다.

결국, 지민은 손엔 자료를 쥔 채로 고개를 돌려 정국의 자는 얼굴을 멍하니 쳐다봤다. 흐뭇한 미소를 짓다가도 자료를 바라보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언제 다 봐, 이걸. 하아. 크게 한숨을 쉬고 다시 집중하려는데 정국이 눈을 번쩍 떴다.


“아, 까, 깜짝이야.”

“놀랐어요? 왜요?”

“그렇게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면…후우.”


아아. 정국이 작게 탄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천천히 눈 뜰게요.”

“그, 그래. 고맙다.”

“형, 근데 안 자요?”

“아. 나 뭐 좀 볼 게 있어서.”

“무슨 회사가 야근도 시키고 재택근무도 시켜요?”

“그러게….”


불만스럽다는 듯 미간을 찡그린 정국의 품 안에서 토끼 인형이 납작하게 눌려갔다. 한쪽 볼을 볼록하게 만든 모양새가 불만이 큰 모양이었다.


“금방 끝낼게. 왜, 불 켜져 있어서 그래?”

“안드로이드한테 무슨 상관이에요.”

“아, 그렇네.”


지민이 머리를 긁적였다. 종종 지민은 정국이 안드로이드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했다. 지민을 빤히 바라보던 정국이 품에 있던 토끼를 번쩍 들었다가 코앞으로 가져오며 말했다.


“얘 형이라고 생각하라고 했죠?”

“응? 응.”


지민이 자료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들어 정국을 힐끔 보고는 다시 자료로 시선을 내리며 대답했다. 빨리 끝내고 자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남은 페이지에 집중하려는데 어디선가 귀 끝이 화끈거리게 만드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쪽. 쪼옥. 외설적인 소리에 지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곤 고개를 들었다. 너무 졸린 나머지 환청을 듣나 싶을 정도였다.


“너, 너, 너, 뭐, 뭐해?”


정작 소리의 주인공은 태연하게 눈은 끔뻑였다.


“뽀뽀해요.”


그걸 왜 인형이랑 하고 있어…! 그렇게 소리치려던 지민은 조금 전 정국이 했던 말이 떠오르자 귀 끝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긴 한데 말이 나오질 않았다. 입을 뻐끔거리는 지민을 바라보던 정국이 토끼 인형의 뒤통수를 잡더니 시선을 지민에게 고정한 채 쪽쪽 소리까지 내가며 토끼 얼굴 곳곳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야, 야!”


참다못한 지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국이 태연한 얼굴로 물어왔다. 왜요? 형이라고 생각하라면서요. 말문이 막힌 지민이 얼굴까지 시뻘겋게 달아오르자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지금 그러니까 뽀, 뽀뽀를 나라고 생각하란 인형한테 저렇게…. 고개를 파묻고 도리도리 젓던 지민이 조금 진정이 된 후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정국은 언제 그런 행동을 했냐는 듯 멀건 얼굴로 품에 토끼 인형을 꼬옥 껴안은 채 멀뚱멀뚱 지민을 보고 있었다.


“너, 너, 그거 하지 마!”

“뭘요?”

“왜 인형한테 뽀뽀해!”

“형이라고 생각하라면서요.”

“그래도 그렇지!”

“그럼 형이 해줘요.”

“…어?”


지민이 얼빠진 얼굴로 정국을 바라봤다. 정국은 볼을 부풀린 채 입을 삐죽였다. 일어선 채로 굳은 지민을 바라보던 정국이 허리께까지 덮고 있던 이불을 들치더니 지민을 불렀다.


“아니면 그냥 와서 자요.”

“자, 자자고?”


멍하니 있던 지민이 화들짝 놀라 반응하자 정국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형, 무슨 생각 해요?”


정말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은 수준이었다. 지민은 다시 한번 두 손에 고개를 푹 묻어야 했다.


“계속 그렇게 밤새 서 있을 거예요?”

“그래, 자자.”


지금 이 상태에서 종이 쪼가리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지민은 체념한 듯 책상 위를 정리하고는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가 얌전히 정국의 옆에 누웠다. 머리맡에 놓인 스위치로 불을 끄기 무섭게 정국이 지민을 꼭 끌어안았다. 심장이 쿵쿵 뛴다. 지민은 한참 동안 천장을 바라보다 겨우 잠이 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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