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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제로 디그리 04

너의 하루





지민은 새벽 내내 잠을 설쳤다. 눈을 감으면 자신을 빤히 쳐다보던 정국의 눈빛이 생각났고 눈을 뜨면 어둠이 가득한 천장에 정국의 얼굴이 둥둥 떠다녔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겨우 잠드나 싶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정국이 자신을 깨우는 것이 느껴졌다. 일어나야 할 시간이었다. 딱히 잠을 잔 것 같지도 않았다. 해소되지 않은 피로감에 이불 속으로 자꾸 파고드는 것을 정국이 빼내지 않았다면 지금쯤 지민은 사무실이 아니라 침대의 늪에 빠져 정신없이 허우적거리고 있을 것이 뻔했다.

정국의 손길에 이끌려 눈도 뜨지 못하고 비몽사몽 한 채 준비를 마치고 난 지민이 신발을 느릿느릿 신으며 잔뜩 부은 눈을 겨우겨우 떴다. 아직 멍한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어젯밤과는 동일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말간 얼굴을 한 정국이었다. 현관까지 따라 나와 배웅을 하는 정국의 얼굴을 차마 똑바로 보지도 못한 채 지민은 도망치듯 집을 빠져나왔다. 아직도 심장이 쿵쾅거린다. 현관문에 기댄 채 숨을 고르던 지민은 무심코 확인한 시간에 화들짝 놀라 달리기 시작했다. 오늘도 지각이었다.

정국은 쾅 닫히는 문을 바라보며 입을 삐죽이다 팔 한쪽이 잡혀 땅에 질질 끌리고 있던 토끼 인형을 안아 들었다.


“형아가 왜 그럴까, 쿠키?”


인형인 쿠키가 답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지만, 정국은 마치 다 안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으으음…, 모르겠다. 대화라도 하는 것처럼 쿠키의 팔을 잡고 흔들며 중얼거리던 정국이 눈을 굴리다 말고 하품을 했다. 졸음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이었다. 일단 한숨 자고 생각하자. 너도 좋지? 대답 없는 쿠키의 팔을 흔들며 정국이 터덜터덜 거실의 소파로 향했다.

쿠키를 품 안에 안은 채 소파에 반듯하게 누워 천장을 바라보는 정국은 오늘따라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허둥거리던 지민의 모습을 곰곰이 곱씹었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     *     *

 


사무실에 도착해 자리에 앉기까지도 지민의 머릿속은 온통 정국의 생각으로 복잡했다. 어찌나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었는지 내릴 역마저 지나칠뻔했다. 문이 닫히기 전 간신히 지하철에서 내린 지민이 시간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발걸음을 빨리했다.

숨을 헐떡이며 하얗게 뜬 얼굴로 자리에 앉은 지민은 업무를 시작하기 위해 화면을 켜자마자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상념이 전부 날아가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대형 프로젝트를 맡은 팀의 막내가 해야 할 일은 상상을 초월하는 양이었다. 아, 아니 이걸 어떻게 다…. 망연자실한 얼굴로 고개를 책상에 박고 현실을 부정하려고 했지만, 회의를 시작하겠다는 목소리가 그마저도 하지 못하게 했다.

회의실 안은 평소와 달리 긴장감이 맴돌았다. 여태 맡아왔던 프로젝트들에 비해 규모가 크다는 것이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덩달아 긴장한 지민의 시선이 회의실 내부를 부지런하게 돌아다닌다. 입사 후 처음 참여하게 된 대형 프로젝트에 입안이 바짝 마르는 것만 같았다.

곧 팀장이 들어오고 본격적으로 회의가 시작되었다. 지민은 정신을 다잡고 화면과 팀장의 말에 집중했다. 원대한 포부는 없다 해도 잘 해내고 싶었다. 브리핑을 듣다가 겁이 날 때면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정국의 말을 떠올렸다. 그러면 조금 힘이 났다. 내내 경청하던 지민은 팀원들이 각자 맡게 된 일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자 어색하게 굳은 표정으로 하하 웃었다. 많은 양의 자료를 보고 간추리는 것. 지민에게 주어진 첫 번째 일이었다.

할 수 있죠? 믿어요. 자신을 바라보며 묻는 팀장의 목소리와 쏠리는 팀원들의 시선에 지민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네, 네, 그럼요. 회의실에 들어오기 전만 해도 한숨을 푹푹 내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다행히도 팀장은 지민의 대답이 만족스러운 듯 보였다. 그럼 남은 한 주도 모두 파이팅 하시고. 힘이 잔뜩 들어간 팀장의 격려를 끝으로 오전 회의는 끝이 났다. 언제 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했냐는 듯 다시 우울한 얼굴로 돌아온 지민이 느릿느릿 자료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앞으로 둥둥 ‘야근’ 두 글자가 떠다닌다. 지민은 남몰래 한숨을 쉬며 회의실을 나섰다.

 

 



지민은 퀭한 얼굴로 책상 앞에 앉아 화면을 빽빽하게 채운 활자들을 읽어내려갔다. 광고를 맡게 된 제품에 대한 상세한 설명서와 각종 사례를 마구잡이로 모아놓은 파일은 보는 것만으로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다음 주에 있을 발표에 핵심만 정리된 내용이 필요했으니 적어도 이번 주말까지는 어제 뭉치로 받았던 자료까지 포함하여 모든 정리를 끝마쳐야 할 것이었다. 사표 쓸까. 끝이 보이지 않고 이어지는 활자를 텅 빈 눈으로 보며 사직을 진지하게 생각하던 지민은 곧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정국을 떠올리곤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렇게 말간 얼굴로 응원해줬는데 사표라니.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사표 생각을 머리에서 지운 지민이 다시 정신을 다잡고 화면을 읽어내려갔다. 안드로이드의 작동 원리나 동력원에 관한 내용은 천상 문과인 지민에게 전혀 다른 세계의 이야기같이 느껴졌다. 그래도 이해하려고 노력하던 지민은 같은 단락을 다섯 번을 읽고 나서야 원리를 이해하려고 하지 말아야겠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내가 할 일은 그냥 요약정리야. 괜히 이해하려고 하지 말자. 머리한 구석에서 불타오르려는 오기를 꾹꾹 눌러 밟으며 지민은 다짐했다. 이렇게 허비할 시간이 없었다.

이해할 수 있는 선에서 원리를 파악하며 정리하느라 팔자에도 없는 과학 공부를 하던 지민은 문득 의문점이 생겼다. 기본적으로 안드로이드는 프로그래밍 된 데이터에 기반을 두어 연산하고 추론하고 행동한다. 다시 말하자면 안드로이드가 하는 의사소통은 모두 이 데이터의 연산작용에 의한 것이란 소리다. 나아가 탑재된 소프트웨어에 따라 연산작용을 할 수 있는 데이터의 양이 다르고 당연히 더 최신의, 더 고가의 소프트웨어를 탑재할수록 가격이 올랐다.

지민은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든 한 문장에 발목이 잡혀 페이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감정의 연산작용을 하는 프로그램은 아직 개발이 진행 중이라는 내용이 담겨있는 페이지였다.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안드로이드는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정국은 어떠한가. 기업에서 판매 중인 안드로이드의 후기를 읽어보고 주변인들이 구매한 안드로이드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에서 지민은 은연중에 정국이 이들과 매우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저 요즘 기술력이 좋구나, 하고 넘기기엔 어딘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정국이 지민과 있을 때 보인 얼굴이나 행동에는 명백한 감정이 드러나 있었다. 그것도 매우 정교하여 사람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훨씬 고가의 모델이니 더 정교한 소프트웨어가 탑재된 것은 아닐까 싶어 같은 기종의 사용 후기들을 찾아보았으나 온통 낯뜨거운 내용뿐이었다. 지민은 얼굴이 달아오른 채로 황급히 띄워두었던 창을 껐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정국에 대해 생각하느라 벌써 30분이나 지나 있었다. 지민은 읽다 멈춘 페이지부터 시작해서 다시 빽빽한 활자를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점심시간까지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     *     *

 


한숨 자고 일어난 정국은 눈을 비비며 자는 사이 바닥에 떨어진 쿠키를 들어 품에 안았다. 이제 뭐 하지. 멍하니 앉아 말랑말랑한 쿠키의 배를 만지작거리던 정국은 청소나 할까 싶은 마음에 자리에서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지민이 딱히 집을 어지럽히며 사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크게 어질러진 것도 없었다. 킁. 한 번 코를 찡긋하고 깔끔한 거실을 둘러보던 정국은 쿠키를 소파에 앉혀놓은 후 정신없던 아침의 흔적이 그대로 남은 침실로 향했다.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지민을 빼낸 이불이 뱀이 벗어놓은 허물처럼 침대 위에 흐트러져있었다. 방의 창문을 열고 침대 옆으로 돌아온 정국이 이불을 손에 쥐고는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눈빛으로 이불의 모서리끼리 맞춘 후 반듯하게 개켰다. 그 후 베개를 정돈하고 그 아래로 개킨 이불까지 잘 놓아둔 정국이 마지막으로 시트까지 정돈하곤 뿌듯한 표정으로 굽혔던 허리를 폈다.

침대를 정리하고 나자 이번엔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어젯밤 지민이 손에 쥐고 있던 종이들은 보이지 않았으나 어딘가 어수선하게 늘어진 책상 위를 바라보던 정국은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는 펜들을 주워 병아리가 그려진 앙증맞은 필통 안에 집어넣었다. 그다음엔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태블릿을 주워 충전기를 찾아 연결도 해주었다. 의자까지 제대로 집어넣고 나자 또 할 일이 사라졌다.

머리를 긁적이며 침실에서 나선 정국은 쿠키가 앉아 있는 소파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청소를 더 하고 싶어도 곧 녀석이 활동할 시간이었다. 정국이 다시 쿠키를 품에 안고 무릎을 모아 앉기 무섭게 삐빅거리는 작은 기계음과 함께 녀석이 튀어나왔다. 슬림한 메탈바디를 자랑하는 녀석은 지민이 입사하던 해 신입사원 환영회에서 경품으로 타온 것으로, 꽤 고가의 로봇 청소기였다.

유영하듯 소음 하나 없이 우아하게 바닥을 돌아다니는 녀석은 정국의 일거리를 빼앗고 있는 가장 큰 적수였다. 정국은 몸을 둥글게 만 채로 적대감이 가득한 눈으로 집 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둥근 고철 덩어리를 노려봤다. 거실 끝으로 향했다 돌아온 녀석이 못마땅해서 정국은 한쪽 볼을 부풀린 채로 상체에 힘을 줬다.


“해보자는 거야? 왜 노려 봐?”


정국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녀석이 맑은 기계음 소리를 냈다. 정해진 루트의 청소를 마쳤다는 뜻이었는데 꼭 정국의 말에 대답하는 것 같은 타이밍이었다. 둥근 몸체에 완벽한 대칭을 이루며 자리한 버튼이 꼭 자신을 바라보는 눈처럼 보여서 정국은 녀석의 판판한 상판을 노려보았다. 로봇 청소기와의 의미 없는 기싸움에 정국의 가슴과 무릎 사이에 낀 쿠키만 납작하게 눌려 꾸깃꾸깃해져 갔다.

제자리에 멈춰 삑삑거리는 소리를 내던 로봇 청소기는 정국이 쳐다보거나 말거나 유유히 거실을 빠져나가 침실로 향했다. 입을 삐죽이며 그 얄미운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던 정국은 청소기가 사라지자마자 끌어모아 안고 있던 다리를 편 후 쿠키의 말랑말랑한 몸을 만지작거렸다.


“이제 뭐 하면 좋을까, 쿠키야?”


쿠키의 팔을 잡고 흔들흔들 흔들던 정국의 머릿속에 어두운 방의 불이 켜지듯 일기장의 존재가 떠올랐다. 할 일이 생겼다.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정국은 곧바로 일어나 침실로 향했다. 마침 침실 청소를 마친 로봇 청소기가 나오는 중이었다. 할 일을 마치고 충전을 하러 돌아가는 청소기를 향해 정국은 혀를 빼꼼 내밀어 보였다. 이긴 것 같아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던 일기장을 꺼내든 정국은 망설이다가 지민의 필통 안에서 펜 한 자루를 꺼냈다. 떨리는 마음으로 다이어리를 펼치자 연간 계획표가 가장 먼저 보였다. 페이지를 넘기자 1월부터 12월까지의 계획 페이지가 쭉 이어졌고 그 뒤는 빈 페이지였다. 쿠키를 한쪽 옆구리에 낀 채로 책상에 앉은 정국이 빈 페이지의 가장 첫 장을 펼쳐둔 채로 펜 끝으로 턱을 꾹꾹 누르며 생각에 잠겼다. 막상 쓰려고 하니 무슨 말을 써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x 월 x 일. 날씨 맑음!

자고 일어나서 침대도 정리하고 책상도 정리했다. 잘했죠? 청소하려고 했는데 로봇 청소기가 혼자 다 했어요. 나쁘다. 그래서 쳐다봤더니 걔도 절 봤어요. 흥. 아, 맞다. 쿠키랑도 잘 놀았어요. 그러니까, 음…외롭지 않아요. 형 올 때까지 이제 뭐 하지?

 


일기는 하루를 기록하는 거라고 했는데 오늘 한 일이라곤 정말 저게 다였기에 쓸 말이 떨어진 정국은 멀뚱멀뚱 펜을 잡은 채로 다이어리를 쳐다봤다. 그러나 쳐다본다고 해서 쓸 말이 생각나는 것은 아니었기에 정국은 그냥 다이어리를 덮고 일어났다. TV라도 볼 생각이었다.

 


*      *      *

 


지민은 아침보다 두 배는 퀭한 얼굴로 빨대를 씹었다. 커피는 진작에 다 마시고 빈 통만 남았다. 퇴근 시간은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정시퇴근은 사치스러운 말이었다. 그래도 예상보다는 제법 많은 양의 자료를 본 덕에 아주 늦은 퇴근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잠시 숨을 돌릴 겸 고개를 젖히고 천장을 바라보는데 정국의 얼굴이 둥둥 떠다녔다. 지민은 집을 헤, 벌린 채 천장을 바라봤다. 눈을 한 번 깜빡일 때마다 천장에 떠 있는 정국의 표정이 바뀐다. 말갛게 웃는 얼굴.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 식탁에 앉아 꾸벅꾸벅 졸던 얼굴. 맑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던 얼굴. 다 안다는 듯하던 의연한 얼굴. 그리고…인형에 입을 맞추며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얼굴까지도. 거기까지 생각하자 잠시 멍해 있던 정신이 불이 들어오듯 번쩍 깨어났다.

흐억. 짧고 굵은 감탄사와 함께 몸을 바로 한 지민이 열이 올라 화끈거리기 시작하는 뺨을 감싸 잡은 채로 눈을 굴렸다. 심장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정국과 같은 모델의 안드로이드 후기를 찾아보았지만, 낯뜨거운 내용만 가득했지 정국과 같은 행동을 했다는 내용은 찾을 수 없었다. 후기로 다 담아내지 못하는 상황들이 있을 수도 있고, 사람의 성격이 모두 다르듯 안드로이드도 개체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합리화를 하려고 해도 마음 한구석의 찜찜한 기분은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는 건 아니었다. 이제 와선 정국의 정체가 뭐이든 간에 상관없었다. 정국은 그냥 정국이었다. 소파에 앉아 사다 준 토끼 인형을 안고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며 TV를 보고 있을 정국을 생각하니 피로가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한 지민은 훌쩍 지나가는 시간에 허둥거리며 다음 페이지를 펼쳤다. 시간이 나면 재민에게 은근슬쩍 물어볼 생각이었다.

 


*     *     *

 


지민의 상상 속 모습 그대로 정국은 쿠키를 품에 안은 채 소파에 앉아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며 TV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시간 보내기에 좋은 액션 영화 한 편을 다 보고 나서 무료하게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는데 형형색색의 색채가 정국의 눈을 사로잡았다. 정국은 리모컨을 내려놓고 입을 반쯤 벌린 채 화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운 재료들을 현란한 솜씨의 셰프가 요리하는 중이었다.

우와. 절로 감탄이 나오는 솜씨였다. 셰프의 요리가 끝나고 시식을 한 패널들의 극찬이 이어졌다. 맛있겠다, 그치? 쿠키에게 무심코 말을 걸던 정국이 조금 시무룩해진 표정이 되어 웅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맛있다는 건 어떤 걸까? 오물오물 음식을 씹는 지민의 입술이 떠올랐다. 어딘가 위축되는 기분에 정국은 무릎을 끌어모았다.

프로그램된 데이터는 이런‘감정’을 박탈감이라고 했다. 별로 다시 느끼고 싶은 감정은 아니었다. 그러는 사이 화면에는 복장을 갖춰 입은 안드로이드가 나와 요리 재료들 앞에 섰다. 정국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가사용 안드로이드 HK-1080. 곧 출시 예정인 요리에 특화된 가사용 모델이었다. 가장 많은 레시피를 탑재하고 있으며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섬세한 요리가 가능하다는 설명이 MC와 자막을 통해 나오고 있었다.

수많은 레시피를 오차 없이 요리 가능한 안드로이드와 셰프들의 요리 대결은 요새 제법 유행하고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여태까지의 대결에서는 셰프 군단이 약 80%의 확률로 승리를 했는데요! 과연, 새롭게 선보인다는 모델이 승리할 수 있을지! 아, 상당히 기대됩니다.”


과장된 몸짓과 톤으로 MC가 모든 주의를 준비를 마치고 서 있는 안드로이드에게로 향하도록 만들었다. 카메라가 표정 없이 서 있는 안드로이드를 클로즈업한다.


“자, 이제 곧 시작됩니다.”


카운트다운과 함께 긴장감을 더해주는 음악이 배경으로 깔린다. 곧 시작을 알리는 맑은 종소리가 스튜디오 안을 울렸다. 소리에 맞춰 안드로이드는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교한 간격으로 썰려지는 채소를 카메라가 비춘다. 정국은 최면에 걸리기라도 한 듯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봤다.


“정말 정교한 칼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습니까?”


MC의 질문에 게스트로 나온 여자가 놀랍다는 듯 리액션을 한다. 목소리도 제법 흥분된 듯 높아져 있었다.


“너무 신기하네요. 이렇게 와서 직접 보는 것도 신기한데 정말 기계가 하는 것처럼 칼질이 정교하고…또 요리 전문의 최신형 안드로이드라니까 더 기대도 되네요.”

“그렇죠. 근데 기계가 하는 거 맞지 않습니까?”

“아! 그렇네요.”


하하 호호 웃는 소리가 가득하다. 정국은 얼굴을 찌푸렸다. 뭐가 웃긴 거지?


“어떻게, 누가 이길 것 같으십니까?”

“저는 안드로이드 친구가 이기지 않을까.”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음…아무래도 전문 모델이고. 여러 훌륭한 셰프분들의 레시피…황금 레시피 같은 걸 가장 많이 알고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기대가 됩니다.”

“자, 혜선 씨는 안드로이드가 이길 것 같다고 하셨는데 진욱씨는 어떠십니까?”

“저는 그래도 사람이 이기지 않을까. 셰프님이 이기실 것 같습니다. 실제로도 오늘 요리 아주 훌륭했고요. 레시피와 오차 없이 요리한다고 해도 숙련된 셰프분들의 그 노하우, 뭐 그런 건 카피할 수 없는 거니까요.”


그 후로도 누가 이길 것인가에 관한 토론이 이어졌다. 정국은 여전히 어딘가 불쾌해 보이는 얼굴로 TV 화면을 보고 있었다. 안드로이드는 인간의 행동을 카피하고 습득한다는 말은 꼭 ‘너는 영원히 이 경계를 넘을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 같이 정국은 느껴졌다.


“자! 이제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정국이 상념에 잠겨있는 사이 제한시간이 종료되었다. 안드로이드는 시간에 딱 맞춰서 요리를 완성했다. 화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군침이 돌게 하는 모양새를 갖춘 요리가 MC와 출연진의 앞으로 놓였다.


“어머, 이거 정말 맛있는데요?”


출연진 한 명의 말을 필두로 여기저기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카메라가 다시 안드로이드의 얼굴을 잡는다. 상황에 따른 착시인지 그 얼굴이 웃고 있는 것도 같았다. 정국은 저 안드로이드가 분명 기뻐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시식이 끝나자 음식에 대한 평가와 함께 대화가 이루어지다 투표가 시작되었다. 정국은 쿠키의 팔을 꼭 잡아 쥐었다.


“저 안드로이드가 이겼으면 좋겠다, 그치?”


긴장감 있는 음악이 흐르고 곧 화면에 결과가 나왔다. 6:4로 안드로이드의 승리였다. 정국의 표정이 밝아졌다. 꽤 기쁜 얼굴이었다. MC가 안드로이드에게 다가가 소감을 묻는다.


“만족하셔서 다행입니다.”


안드로이드는 짧은 말을 남기고 빙그레 미소지었다. 곧 다음 주에도 찾아오겠다는 클로징 멘트와 함께 프로그램은 끝이 났다. 히히. 정국은 앞니가 보이게 웃으며 TV를 끄고 침실로 들어가 다시 다이어리를 펼쳤다. 구구절절 오늘 TV에서 보았던 것에 대해 써 내려갔다. 영화에 관한 이야기가 끝이 나자 방금 본 요리 프로그램에 관해 쓸 차례였다. 본 내용과 결과에 관한 기사처럼 객관적 사실을 늘어놓던 정국이 제법 진지한 얼굴로 펜을 움직였다.

 

인간은 왜 안드로이드와 시합을 하려고 할까요? 안드로이드는 결국 인간을 이기지 못할 거라는 걸 확인받고 싶은 걸까요? 인간은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요?

 

정국은 다이어리를 덮었다. 벌써 저녁 시간이었다.

 


*     *     *

 


지민은 어제보다는 조금 이른 시간에 회사를 나설 수 있었다. 저녁까지 해 먹을 기운이 없어 역 앞에서 도시락을 구매했다. 하루의 피로가 다 몰려오는 기분에 서둘러 집에 가서 발 뻗고 쉬고 싶었다.

어제와 달리 거실엔 불이 켜져 있었다. 지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신발을 벗어 가지런히 놓았다. 그러는 사이 정국이 현관으로 지민을 마중 나왔다.


“왔어요?”

“응. 혼자 잘 있었어?”

“혼자 아닌데.”


의아한 지민의 표정에 정국이 쿠키를 번쩍 들어 보였다. 토끼 같은 얼굴로 토끼 인형을 들고 혼자 아니라고 말하는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름도 지어줬어요.”

“이름? 뭔데?”

“쿠키요.”


정국이 쿠키의 팔을 들어 흔들었다. 꼭 쿠키가 인사하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푸흐흐. 터져나온 웃음을 참지 않은 채 지민은 쿠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안녕, 쿠키.”

“나는요?”


그 모양새를 지켜보던 정국이 불쑥 말했다. 응? 지민이 고개를 들어 정국을 바라봤다. 어딘가 못마땅해 보이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어…. 잠시 뜸을 들이던 지민이 활짝 웃는 얼굴로 자신보다 눈높이가 조금 위에 있는 정국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예쁘다, 우리 정국이.”

“나 예뻐요?”

“그럼.”


히힛. 정국이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냈다. 마지막으로 탄탄한 정국의 엉덩이를 두어 번 토닥인 지민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 분명 현관문을 열기 전까진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피곤했는데 문을 열고 정국과 마주하자 피로감이 싹 사라졌다.

식탁 위에 사 온 도시락을 내려놓고 자신을 졸졸 따라다니는 정국도 놔둔 채 지민은 가장 먼저 욕실로 향했다. 다행히도 정국은 욕실까지 따라 들어오지는 않았다.

지민이 씻는 사이 남겨진 정국은 식탁 위에 올려진 도시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아까 전의 프로그램에서 MC가 했던 말을 기억해냈다.


‘최근엔 가정용 안드로이드들이 많이 보급되었죠?’


그리고 지민과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다. 지민은 분명 기종이 바뀌었다고 말했었다. 아. 지민에게는 밥을 해주고 가사 전반을 도와줄 안드로이드가 필요했던 거였다. 그러면 말을 하지…. 괜히 입을 삐죽인 정국이 빠른 속도로 데이터의 바다에서 요리 레시피들을 찾아 건져 올렸다. 지민이 없는 집에서 할 일이 하나 더 생겼다.

 

 



개운하게 씻고 나온 지민은 정국이 미리 데워놓은 도시락을 맛있게 먹어치웠다. 쿠키를 옆에 앉힌 채로 자신과 마주 앉아 있는 정국의 모습이 좋았다. 괜히 간질거리는 마음에 냉수를 들이켠 지민이 후다닥 먹은 자리를 치워다.


“오늘도 일해요?”

“응? 아니. 오늘은 쉴 거야.”


침실로 향하며 말한 지민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정국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침대로 먼저 뛰어 올라간 정국이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눈만 빼꼼 내밀고 지민을 바라봤다. 지민은 정돈된 책상을 바라보다 정국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책상 치운거야?”


정국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어서 칭찬해달라는 눈빛이었다. 지민은 기꺼이 정국이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잘했다. 고마워.”


깔끔해진 책상에 덩그러니 올라가 있는 다이어리를 발견한 지민이 조금 설레는 마음으로 펼쳤다. 제법 많은 양이 적혀 있었다. 찬찬히 흐뭇한 얼굴로 정국의 일기를 읽어내려가던 지민이 마지막 단락을 읽으며 천천히 표정을 굳혔다.

지민의 반응을 기다리던 정국이 묘하게 굳은 지민의 얼굴에 눈치를 보는 듯 큰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일기라는 게 하루 있던 일과 느낀 점을 쓰는 게 아니었나?

정국이 고민하는 사이 지민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정국의 일기를 다시 한번 더 읽고는 고개를 들었다. 정국이 조금 처진 눈꼬리를 하곤 자신을 보고 있었다.


“잘했어. 글도 잘 쓰네?”

“진짜요?”

“그럼.”


정국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지민은 언제 얼굴이 굳었냐는 듯 잔뜩 풀어진 얼굴로 웃으며 침대에 걸터앉아 정국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형이 왜 거짓말을 하겠어.”

“…알았어요, 믿을게요.”


정국의 머리를 한차례 쓰다듬은 후 일어난 지민이 다이어리를 흔들어 보였다.


“형도 일기 쓰고 올게. 내일 읽어봐.”


정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민은 책상 앞에 앉아 정국의 일기가 있는 옆 페이지에 글을 써 내려 가기 시작했다. 자신을 향한 정국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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