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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제로 디그리 08

서울은 흐림




정국의 뽀뽀세례를 받으며 기분 좋게 집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삶이 참 즐겁게 느껴졌는데 쏟아지는 일과 마주하자마자 활기찬 일주일을 향한 의지가 급격하게 꺾였다. 토요일 저녁 길거리에서 훌쩍거리며 행해졌던 사랑한다는 고백 이후로 맞이한 일요일은 마치 자석처럼 딱 붙은 채로 시작하여 딱 붙은 채로 끝이 났다.

그래, 서로 사랑한다는데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뭐가 있겠나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내내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상념과 답답하게 속에 응어리져있던 돌덩어리가 사라져 개운해졌다.

그 마음 그대로 기분 좋게 시작한 한 주였는데. 지민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스케줄러를 빽빽하게 채운 일들을 바라봤다. 당분간도 일찍 퇴근은 그른 것 같았다.


“회의 있어요.”


마음 잡고 업무를 하나 싶었는데 회의가 있다는 말에 다시 덮어야 했다. 뭔가 맥이 끊기는 기분에 지민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지 않아도 할 일이 많은데 또 무슨 일이길래 회의를 한다는 걸까. 지민은 점차 회의라는 단어가 무서워지고 있었다. 딱히 회의 주제를 알려준 것도 아니기에 메모할만한 것만 덜렁 챙긴 채로 지민은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에 앉아 팀장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는데 옆자리 직원들의 대화가 듣고 싶지 않아도 지민의 귀에 와 쏙쏙 박혔다.


“이번에 하나 구매할까 고민했는데 가격이 아무래도 좀 세니까….”

“근데 정말 그렇게 좋대요?”

“완전요. 옆 부서의 한 대리도 애인이랑 헤어지고 샀는데…. 어휴, 남자친구보다 잘한대요.”


주어를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지민은 눈을 도르륵 굴려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러지 않으려고 하는데 자꾸 정국이 생각났다.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라며 몇 번이고 강조하던 리뷰도 떠오른다. 지민이 빠르게 도리질을 쳤다. 어허, 자꾸 무슨 생각하는 거야.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데도 뭉게뭉게 피어나는 자극적인 상상에 지민이 책상에 머리를 쾅쾅 박기 전에 다행히도 팀장이 들어왔다.


“주말 잘 보내셨어요?”

“네.”


너 같으면 잘 보냈겠냐? 는 말이 압축되어 담긴 대답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팀장은 개의치 않는 듯 ‘잘 지내셔서 다행이네요.’ 같은 말을 주절주절 늘어놓으며 자료를 돌렸다.


“이번 주에 클라이언트 미팅도 있고 본격적으로 시작인 거 아시죠? 모두 힘내주세요.”

“예엡!”


그래도 팀원들 사이에서 의지 있는 대답이 들려온다.


“일단 생생한 사용 후기가 필요한데…최근에 M사의 안드로이드를 구매하신 분 계신가요?”


지민의 눈이 바쁘게 굴러간다. 본능적으로 손을 들 뻔했으나 짧은 순간 손을 들면 분명 귀찮은 일이 가득해질 거라는 생각에 가슴께까지 움찔한 팔을 내릴 수 있었다. 모두 같은 생각을 하는 건지, 정말 최근 M사의 안드로이드를 구매한 사람이 없는 건지 회의실 안은 조용했다.


“김 대리. 얼마 전에 샀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 얼마 전은 아니고 몇 달 됐습니다. 당시에도 최신 모델은 아니었고….”

“호진 씨는요?”

“저도…좀 오래됐습니다.”


어딘가 불안한 기운이 스멀스멀 덮쳐왔지만, 지민은 애써 무시했다. 아직 팀원 누구에게도 자신이 안드로이드와 함께 살고 있음을 말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자신과 관련 없는 이야기라고 마음을 놓고 있는 순간 벼락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것 같은 일이 벌어졌다. 미영이 손을 번쩍 들더니 아주 발랄한 목소리로 지민에게 폭탄을 투하한 것이다.


“재민 씨에게 들었는데 지민 씨 최근에 구매하셨다고 하지 않았어요?”

“예, 예?”

“얼마 전에 잠깐 마주쳤었는데 그런 얘길 하더라고요. 아니신가요?”


최재민. 이 원수 같은 놈. 지민이 남몰래 이를 뽀득 갈았다. 난처한 듯 말랑하게 웃으며 고개를 드는데 회의실의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왜 불길한 예감은 벗어나는 적이 없는 걸까. 지민의 얼굴이 천천히 굳어갔다.


“아, 좋아요. 최근에 구매하셨고 모델도 가사용의 최신 모델이라고?”

“아, 아니, 그게….”

“뭐, 어때요? 좋아요? 좋으면 저도 하나 바꾸려고 하는데. 뭐, 요새 화제잖아요. 전문 셰프보다 요리도 잘하고 외모도 선택할 수 있고. 자랑 좀 해봐요. 다들 자랑하기 바쁜데 그동안 어떻게 가만히 있었어요?”


그야 가사용이 아니니까요. 지민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꼼지락거리며 눈을 굴렸다. 도저히 이 상황에서 빠져나갈 방법이 보이질 않았다. 음식 같은 거 만든 거 없냐고 리뷰 하나 멋들어지게 쓰자며 자기들끼리 떠드는 팀원들을 보며 지민은 더 늦기 전에 말해야겠다는 생각에 손을 번쩍 들었다.


“저기요!”


회의실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다시 한 번 지민에게로 향했다.


“저, 제 안드로이드가 그 모델이 아니라서….”


지민은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로 말끝을 흐리며 번쩍 들었던 손도 다시 얌전하게 내려놓았다. 그럼 뭔데요? 물어오는 말에 답하려고 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분명 자신의 의지로 구매했던 모델이 아니라지만 툭 내뱉기엔 무리였다. 목구멍에 걸린 단어는 몇 번이나 심호흡해도 도무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시선은 여전히 집중되어 있고 어서 말하란 듯 재촉하는 몸짓을 취하는 사람들을 보아하니 지민이 말하기 전에는 끝이 날 것 같지가 않았다.


“그…제가 구매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그 좀 배송에 사고가 있어서….”


그래서 어떤 모델이라는 거야? 답답하단 얼굴이 자신을 보는 것에 지민은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SS-1090이에요!”


SS? 회의실이 웅성거린다. 지민은 도저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회사에서 나 성인용품 샀어요, 하고 광고하는 꼴이라니. 머리를 책상에 쾅쾅 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머!”


그때 회의가 시작하기 전에 안드로이드의 구매 여부를 놓고 대화를 나누던 여직원이 놀란 듯 입을 가리며 내뱉은 감탄사 때문에 웅성거리던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그거 성인용 모델 아니에요?”


지민은 정말 진지하게 사표를 쓰고 싶어졌다. 그러나 활자와 싸울 때도 쓰지 않은 사표를 이렇게 허무하게 쓸 수는 없었다. 지민은 이를 악물고 차근차근 변명해나가기 시작했다.


“아, 아니 그러니까 그게 제가 사려고 그런 게 아니라 업체에서 배송을 잘못 보내서….”

“그래서 어때요? 진짜 좋아요?”

“아뇨, 아뇨.”

“별로예요? 완전 장난 아니라던데?”

“그, 제가 사용해 본 적은 없고요….”


하얗게 질렸던 얼굴이 불타는 것처럼 달아올랐다. 정국을 두고 사용해 본 적이 있니, 없니를 이야기하는 것도 싫었다. 그건 꼭 정국을 물건 취급하는 것 같았기에. 자꾸만 그런 말들이 오가자 지민의 표정이 불쾌감을 숨기지 못하고 딱딱하게 굳어갔다. 그런 지민의 표정을 읽은 것인지 아니면 정말 자꾸 옆으로 새는 대화 때문인지 클라이언트랑 이번 주에 미팅이 있으니 공지하겠다는 말과 함께 별 소득 없는 회의가 끝이 났다. 지민은 자신을 힐끔거리는 시선을 무시한 채로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     *     *

 



정신없이 하루가 끝나고 건조한 눈을 꾹꾹 누르며 집에 들어서면 이제는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이가 반갑게 맞이해준다. 왔어요? 응. 배시시 웃는 얼굴로 품에 안기면 등을 토닥여주는 손길이 좋았다. 이렇게 온기가 있고 따뜻한데. 단순한 제품으로서 생생한 리뷰를 담아 후기를 쓰라니. 못 할 짓이었다. 어딘가 피곤해 보이는 지민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정국이 영화 속 한 장면을 떠올려내고선 번쩍 지민의 허리를 들어 안았다. 순식간에 발이 바닥에서 떨어진 지민이 놀라서 정국의 목을 끌어안는다.


“깜짝이야!”

“왜 그렇게 오늘따라 힘이 없어요?”

“그, 그냥….”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야.”


지민이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흐음. 못 미더운 눈으로 지민을 바라보던 정국이 코끝을 맞댄 채로 부비적거렸다. 기분을 풀라는 일종의 애교였다. 자신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애교를 부리는 정국을 보니 정말 거짓말처럼 피로가 싹 녹아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쪽. 가볍게 입술이 닿았다 떨어진다. 지민을 욕실 앞에 내려준 정국이 씻고 오라며 웃었다.

집 안 가득 퍼진 고소한 냄새를 맡으며 지민은 욕실로 향했다.

 



*     *     *

 



“기분은 좀 어떠니.”


중년의 남성, 영진이 방안으로 들어서며 물었다. 며칠 전 어두컴컴한 방 안에 홀로 책상 앞에 웅크려 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인 것처럼 혈색이 좋아진 상태였다. 평생을 쏟은 연구가 드디어 빛을 보기 직전까지 와 있었다. 성공적으로 가동에 성공한 T-001은 영진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고개를 들었다.


“좋아요.”

“그래. 네가 좋다 하니 나도 좋구나.”


자신을 올곧게 바라보는 T-001의 모습에 영진의 얼굴에선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T-001은 영진에게 있어서 자식 같은 존재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그냥 자식이 아닌 모든 것을 한 번 읽고 나서 다시 한 번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 만들어낸 자식이었다. 영진은 아들이 태어나던 그 순간보다도 T-001이 움직이던 순간이 더 기쁠 정도였다.


“오늘은 무슨 생각을 했니?”


실제 자식에게도 들려준 적 없는 다정한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얌전히 의자에 앉은 채로 T-001은 조곤조곤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영진은 그 모든 말을 아주 소중히 기록하고 있었다. 처음 T-001이 태어난 날 그는 영진을 아버지라 부르며 기뻐했다. 영진은 그 모든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보고를 올리는 것뿐이었다. 자신을 무시하던 모든 이에게 드디어 보여줄 날이 왔다. 십 년 전의 실패가 단순한 실패가 아니었음을 증명할 때였다. 뜻을 같이하다가 등을 돌린 이들에게도 똑똑히 보여주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영진은 더 철저하게 준비했다. 그 누구도 영진의 연구와 T-001의 존재를 부정하지 못하도록.


“저는 무엇을 위해 만들어졌나요?”


T-001의 말을 듣던 영진이 멈칫했다. 존재의 의의를 탐구하는 안드로이드라. 허리를 숙인 채로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희열을 느꼈다. 동시에 익숙한 불안감이 등골을 타고 올라온다. 작게 키득 이던 웃음소리가 점점 커져 방안을 울렸다. T-001은 미동 없이 앉아 그런 영진을 바라보았다. 그는 차분히 자신을 만든 창조주의 말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눈을 뜨는 순간부터 T-001은 생각했었다. 자신은 무엇을 위해 태어났고, 존재하고 있는가. 그 어떤 안드로이드도 그런 생각을 하진 않는다. T-001의 모든 말과 행동이 영진의 연구가 성공했음을 증명하는 증거가 되었다.


“존재의 의의를 찾는 것은 모든 고등 생물에게 주어진 숙명 같은 거지. 내 말을 알아듣겠니? 너는 아주 특별하단다.”


존재의 의의? 숙명? T-001은 빠르게 데이터의 바다를 뒤적인다. 아아…. 작은 탄식이 T-001의 입에서 터져 나온다.


“죄송해요. 잘 모르겠어요.”

“그걸 이제 알아가는 것이 너의 일이지.”

“저도 아버지처럼 똑똑해질 수 있을까요?”

“너는 이미 똑똑하단다. 나보다도 더.”


T-001이 고개를 갸웃 기울인다. 그 작은 몸짓 하나하나가 사랑스러웠다. 흐뭇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영진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오늘은 아주 중요한 검사가 있는 날이었다. 영진의 평생을 증명해줄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이리 와서 앉으렴. 겁먹을 필요는 없어.”


T-001은 묵묵히 영진이 가리킨 자리에 앉았다. 인간과 같은 ‘감정’을 가진 안드로이드의 탄생은 영진이 평생을 바쳐 염원했던 일이었고 드디어 그 오랜 소망이 세상에 인정받을 순간이었다. 감정 반응을 시각화시켜줄 장비를 줄줄이 T-001의 머리에 부착한 영진이 아주 사랑스러운 아이를 바라보듯 T-001을 돌아보았다.


“널 아프게 하지 않을 거야. 너는 나의…자식이니까.”

“…저는 아버지를 믿어요.”


영진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기기를 작동시켰다. 좁은 방엔 윙윙거리는 소리만이 작게 울려 퍼졌다.

 



*     *     *

 



“네? 지금 저를 놀리시는 거예요?”


지민이 놀란 얼굴로 펄쩍 뛰었다. 호출을 받고 팀장실로 갈 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잘못한 일이 있던가 빠르게 근래의 일들을 모조리 되짚어 보며 조금 겁에 질렸던 것도 같은데 비밀스럽게 자신에게만 전한 팀장의 말을 듣자마자 그런 생각은 싹 사라지고 그 자리에 황당함만이 자리했다.


“아, 아니 그리고 그건 저희 일도 아니잖아요!”


분명 자신이 다니고 있는 것은 기획안을 짜서 제작업체에 전달하는 부서인데 다짜고짜 사용 리뷰를 작성해달라는 부탁을 가장한 명령을 받았다. 지민은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아 눈썹을 팔(八) 자로 늘어뜨린 채 항의했다. 해야 할 일도 아닌 걸 하게 될 상황도 어이가 없었지만, 그 일이 안드로이드의 사용 후기를 적는 일이라니 더더욱 납득 할 수가 없었다.

입사한 이후로 처음 화를 내는 지민의 모습을 본 팀장은 숨긴다고 숨겼지만, 적잖이 놀란 듯 보였다. 그러나 지민에겐 지금 그런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정국의 모델을 알고 나서 후기를 작성하라는 것은 섹스하고 그 성능에 대한 제품의 후기를 쓰라는 말과 같았다. 지민은 기가 막히고 화가 나 달달 떨리는 손을 꾹 말아쥐었다.


“그걸 왜 제가 해야 합니까! 저희 일도 아니고 후기가 필요한 거면 인터넷에도 많잖아요!”

“일이 어떻게 꼬여서 전달되는 바람에…. 이거 하나만 하면 되는데 어떻게 안 될까? 대신 지민 씨 다른 일은 안 해도 돼! 매일 퇴근도 일찍 해도 되고. 날 봐서라도 한 번만 부탁할게요.”

“아, 아니 무슨 후기가 필요하다고…. 제가 지난주에 다 찾아봤습니다! 인터넷에 넘치는 게 그런 건데….”


팀장의 회유에도 지민은 물러서지 않았다. 섹스 후기를 작성해 보고하라니. 아무리 상사가 까라면 까는 일개 사원이라고는 해도 수치심이라는 게 있었고, 무엇보다 소중한 연인과의 시간을 그런 식으로 쓰고 싶지 않았다.


“인터넷에는 막 그런 자세하면서도 전문적인 후기는 잘 없으니까 하는 말이에요. 부탁할게요. 대신 이번 프로젝트 기간 칼퇴근 약속한다니까? 어디 막 지민 씨가 쓴 거라고 공개되고 그런 거는 아니고…. 참고 자료로도 부분적으로 참고할 거고 유명 블로거들이 글 올릴 거라 신분 노출도 없고…. 진짜 이거 딱 하나만 해주면 완전 편하다니까? 그리고 기왕 좋은 제품인데 사용은 해봐야지. 썩힐 수는 없잖아?”

“아니, 썩히다뇨! 말을 하셔도 꼭 그렇게….”

“어머. 왜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해? 그냥 안드로이드인걸.”


그냥 안드로이드인걸. 그 말이 비수가 되어 지민의 심장을 쿵 내려앉게 했다. 그래, 평범한 사람이 보기엔 그냥 안드로이드지…. 실제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민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한풀 기세가 꺾인 지민의 어깨가 축 처졌다. 팀장의 말에 반박할 수 없는 자신이 미웠다. 말이 없어진 지민의 태도를 자신의 말에 수긍한 것으로 알아들은 팀장이 그럼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나가보라며 손짓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후기를 쓰게 만들 것을 알았기에 지민은 무의미한 논쟁을 그만두고 팀장실을 빠져나왔다. 언젠가는 반드시 팀장의 얼굴에 사표를 던지며 퇴사를 하겠노라 다짐하면서.


자리에 앉기 무섭게 지민은 한숨을 쉬었다. 둘만 있으면 다 괜찮을 거로 생각했는데.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입안이 썼다.



 

*     *     *

 



약속대로 팀장은 모두가 야근하는 사무실에서 지민만을 정시에 퇴근시켜 주었다. 의아한 눈빛이 등 뒤로 따라붙었다. 지민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잘못한 사람처럼 몸을 웅크린 채 빠르게 사무실을 나섰다. 맡은 일의 반 이상이 다른 팀원들의 몫으로 돌아갔다. 이 모든 게 지민이 팀장실에 들어갔다 나온 후에 발생한 일이라서 대놓고 말하지만 않았을 뿐 온 팀에 지민과 팀장 사이에 뭔가가 오갔다고 떠들어대는 꼴이었다. 남은 할부금만 아니었으면 진작에 퇴사하는 건데. 지민은 한숨을 푹푹 쉬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너, 너!”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지민은 원수가 된 친구와 마주한다. 재민이 반갑게 손을 들어 인사를 건네왔다. 지민은 이를 갈며 성큼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너희 팀 대형 프로젝트 들어갔다더니 넌 어떻게 정시 퇴근이냐?”

“누구 덕분에 내가 정시 퇴근도 하고 참 고맙다.”


지민이 이를 악문 채로 답했다. 재민은 그 누군가가 자신을 말하는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로 “이야, 대단한데?” 같은 말을 늘어놓아 지민의 속을 박박 긁었다.


“아, 맞아. 미영 씨 만났는데 너 가사용 모델 아니라며?”


계속 무시하던 지민이 고개를 휙 돌려 재민을 노려봤다. 뭐, 뭐야. 갑자기 왜 그렇게 노려봐? 잔뜩 당황한 재민의 말에 뭐라 쏘아붙이려던 지민이 말을 해서 무얼 하겠나 싶은 생각이 들어 그냥 한숨만 푹 쉬고 말았다.


“왜 그래, 갑자기…. 무섭게.”

“왜 그래, 갑자기? 너. 이씨. 당분간 눈에 띄지 마라, 진짜. 죽는다.”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한다. 눈을 부라리며 으름장을 놓은 지민이 성큼성큼 엘리베이터를 나서고 혼자 남은 재민만 얼떨떨한 표정으로 천천히 닫히기 시작하는 문을 바라봤다. 박지민 진짜 왜 저래…?

지민은 씩씩거리며 빠른 걸음으로 로비를 벗어났다. 찬 바깥 공기를 마시니 열이 잔뜩 오른 머리가 조금씩 진정되기 시작한다.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눈 딱 감고 쓴다 생각하고. 이것만 하면 퇴근 빨리할 수 있다고 하잖아. 그럼 정국이랑 더 오래 있을 수 있는 거야. 부지런히 자기 최면을 건 지민은 이렇게 된 거 보란 듯이 정시 퇴근을 하며 팀장이 말한 ‘아주 편한 삶’을 누릴 생각이었다.

 



*     *     *

 



지민이 현관의 비밀번호를 눌렀을 때, 정국은 소파에 누워 TV를 보다가 이제 슬슬 저녁 준비를 할까 하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삑삑거리는 소리가 현관에서 들리자 토끼 눈을 한 정국이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이상하다, 형은 분명 계속 늦는다고 했는데…. 정국의 얼굴이 혼란으로 물들어갔다. 혹시 도둑인 거 아닐까? 근데 도둑이 이렇게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오나?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말이 안 되는 말이었다. 그러는 사이 현관문이 벌컥 열리곤 지민이 들어왔다.


“형?”

“정국아!”


신발을 벗어 던지더니 자신을 향해 달려와 폴짝 뛰어오르는 지민을 안정적으로 품에 받아낸 정국이 한 바퀴를 빙글 돌고선 지민을 땅에 내려놓았다.


“무슨 일이에요?”

“뭐가?”

“늦는다면서요.”

“아아. 이제 야근 안 하기로 했어!”

“그게 안 하고 싶다고 안 할 수 있는 거였어요?”


정국이 정말 궁금하단 투로 물었다. 지민은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사실은 말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그렇게 됐어. 좋지?”

“당연히 좋죠.”

“그럼 됐지, 뭐.”

“아, 근데 큰일이네요.”

“뭐가?”


큰일이라는 말에 지민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정국은 제법 심각한 얼굴이었다. 무, 무슨 일이 있나? 살짝 긴장하고 있는데 정국이 미간까지 찌푸린 채로 말했다.


“저녁을 아직 안 했어요.”


아. 지민이 맥빠지는 소리를 냈다가 이내 푸스스 웃는다. 그러는 동안에도 정국은 심각한 얼굴이었다. 아니, 말도 없이 이렇게 일찍 오면…. 내가 맛있는 거 해주려구 했는데…. 시무룩해진 정국이 너무나도 깜찍하여 뽀뽀를 퍼붓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누르며 지민은 정국의 탄탄한 엉덩이를 토닥였다.


“오구, 그랬쪄요?”

“아, 놀리지 말고요!”

“그럼 밖에 나갈까?”

“외식하자고요?”

“응. 나가자.”


지민이 정국의 손을 덥석 붙잡고 현관으로 끌었다. 얌전히 끌려가던 정국이 뭔가 떠올랐다는 듯 멈칫하더니 자리에 멈춰 섰다. 지민이 의아한 얼굴로 꼼짝도 하지 않는 정국을 돌아봤다.


“저 그럼 옷 갈아입고 올게요!”


그러곤 지민이 말릴 새도 없이 집안으로 총총 뛰어가 버렸다. 지민은 팀장을 저주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매일 이렇게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다면 섹스 후기 까짓거 눈 딱 감고 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간다는 말에 신이 났는지 순식간에 지민이 사주었던 옷으로 갈아입은 정국이 달려 나왔다. 다시 봐도 정국과 한몸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잘 어울리는 옷이었다. 흐뭇하게 정국을 위아래로 훑어보던 지민은 다음 순간 불쑥 다가온 정국에게 그대로 입술이 먹혔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정신이 쏙 빠지는 것만 같다. 지민은 정국을 끌어안은 채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러지 않았으면 지민의 입술이 퉁퉁 부어오를 때까지 물고 빨았을 것이 분명했다. 지민의 신호에 정국이 아쉬운 얼굴로 입술을 천천히 떼었다.


“형 얼굴 엄청 빨개요.”

“말을 좀…하고 해주라.”


후후하하. 심호흡하며 쿵쾅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지민이 투정했다. 알겠어요. 웃음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정국이 답했다.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어?”


나간 김에 이곳저곳 가 볼 생각이었다. 음…. 고민하는 정국을 바라보며 지민도 가 볼 만한 곳을 여러 군데 떠올려보았다. 여러 장소를 떠올리며 돌아가던 머릿속이 한 곳에서 멈췄다. 도시의 야경이 한눈에 보이는 전망대가 마침 집 근처에 있었다. 낭만적인 도시의 밤을 볼 수 있는 전망대는 당연하게도 연인들에게 인기가 높은 데이트 명소이기도 했다. 지민은 망설임 없이 전망대를 목적지로 정했다.


“형은 가고 싶은 곳 있어요?”

“응. 방금 생각났어.”

“어디요?”

“가 보면 알 거야.”


의미심장하게 웃은 지민이 빨리 가자며 정국을 잡아끌었다. 정국은 더 묻지 않고 얌전히 지민의 뒤를 따랐다.

 



*     *     *

 



평일 저녁인데도 전망대엔 사람이 많았다. 전망대에 도착한 순간부터 도시의 불빛에 시선을 뺏긴 정국은 입을 헤 벌린 채 유리 벽 앞으로 다가갔다. 곳곳에 손을 잡거나 포옹을 하는 연인들이 보였다. 괜히 간질거리는 느낌에 지민은 마주 잡은 정국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야경과 옅은 조명에 비친 정국의 옆얼굴을 보고 있으니 또 심장이 쿵쾅거렸다.

발끝으로 땅끝을 톡톡 치며 서 있던 지민이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자 정국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형.”

“응?”

“지금 되게 예뻐요.”

“어?”

“키스해도 돼요?”


정국의 얼굴이 성큼 다가온다. 지민은 눈을 꼭 감는 거로 대답을 대신했다. 은은한 조명을 배경 삼아 입술이 맞닿았다. 유난히도 달이 밝은 날이었다.

 

 





또 입술이 부르트도록 맞붙어있던 입술이 떨어졌다. 정국이 그제야 뭔가 생각났다는 듯 지민에게 물었다.


“형 근데 밥 먹어야 하지 않아요?”

“아, 맞다.”

“아, 맞다가 아니잖아요. 배 안 고파요?”

“으음…별로 그렇게 고프진 않은데….”

“아니야. 그래도 잘 먹어야 해요.”


정국이 지민의 손을 잡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머릿속에선 이미 주변의 식당을 다 찾은 후였다. 그중 가장 괜찮아 보이는 식당의 위치를 확인한 정국이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향했다.

역시나 데이트 코스의 하나인 레스토랑은 연인들로 가득했다. 입구에 멈춰서 기다리니 곧 서버가 와서 둘을 자리로 안내했다. 그리고는 아주 자연스럽게 두 사람 몫의 세팅을 해주었다. 정국은 물끄러미 자신의 앞에 놓인 식기를 바라보다 서버에게 다시 건네려고 했다.


“저기….”

“여기 추천 음식이 뭐예요?”


그 모습을 본 지민이 재빨리 정국의 말을 가로챘다. 서버는 메뉴판을 보여주며 하나하나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콧등을 찡긋한 정국이 서버를 부르느라 허공에 애매하게 떠 있던 손을 내렸다. 두 명이 먹을 양을 주문받은 서버가 사라지자 정국이 뭐 하냐는 얼굴로 지민을 바라봤다.


“왜?”

“왜 이인분 시켜요? 형 배고팠어요?”

“아니.”

“근데 왜…. 이것도 필요 없는데.”


정국이 자신의 앞에 놓인 식기를 가리켰다. 지민은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네 몫이야.”

“하지만 저는….”


음식물을 먹지 못하는걸요. 정국의 뒷말은 굳이 듣지 않아도 예상할 수 있었다. 안드로이드니까. 먹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지민은 정국이 안드로이드라고 선을 긋는 것이 못마땅했다. 인간과 안드로이드 이전에 정국은 그냥 정국이었으며 지민에게 있어선 아주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였다. 정국이 이 사실을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데이트하기 딱이지?”

“…그렇네요.”

“우리도 데이트하러 왔고.”

“…….”

“두 명이 왔으니까 이인분을 시켰고.”


정국의 눈동자가 파도에 잠기듯 일렁인다.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는 기분은 말로 다 표할 수 없었다. 둘은 마주 보며 말없이 웃었다. 정국은 이 레스토랑에 있는 어떤 이보다도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     *     *



 

집으로 오는 길에도 마주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가끔 눈이 마주치면 간질거리는 마음에 웃기도 했다. 다소 쌀쌀한 날씨였지만 하나도 춥지 않았다. 둘이었으니까.

집으로 돌아와 씻고 옷을 편하게 갈아입은 후 소파에 앉아있던 지민은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가 생각났다. 힐끔힐끔 흰 티를 입고 있는 정국의 가슴팍을 훔쳐보기도 잠시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아니면 분위기라도 잡아서 자연스럽게 이어 가야 할지 고민하느라 작은 머리는 터질 듯이 팽팽 돌아갔다. 괜히 혼자 어색해진 지민은 정적이라도 피하자는 생각에 TV를 켜 볼륨을 작게 맞췄다. 정국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TV 화면을 보고 있었다. 한창 뉴스를 할 시간이었다.


“그, 정국아….”

“네, 형.”

“오해하지 말고 들어 봐.”

“네.”

“그…내가….”


아씨, 이걸 어떻게 말해. 지민이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일 때문에 너랑 섹스해야 해! 이렇게 말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하고 싶다고 조르자니 그건 그거대로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정국이야 자신이 하자 했을 때 거절하지 않겠지만, 정국의 입장에서 몇 번을 생각해봐도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였다.


“정국아, 우리 이렇게 분위기 좋은 곳에서 데이트도 하고 했으니까…그다음을…. 정국아?”


정국의 시선이 TV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기에 지민도 화면을 바라봤다. 긴급 속보가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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