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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제로 디그리 10

한참을 뛰어오기만 한 너에게



정국은 지민의 반응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혹시라도 지민이 겁을 먹거나 실망하면 어쩌나 싶은 마음에 잔뜩 긴장한 채였다. 정국이 큰 눈을 굴려가며 마음 졸이고 있을 때 지민은 지민대로 혼란스러운 감정을 정리 중이었다. 솔직히 아무렇지도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다만 지민이 조금이나마 침착할 수 있었던 것은 은연중에 정국이 다른 안드로이드와는 다른 특별한 존재라는 생각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정국의 사고 체계의 기저에 깔린 프로그램은 지민이 알게 된 이상 그를 가만히 두어선 안 된다고 했다. 연구소는 긴급 속보를 내보내고 경찰까지 동원해서 자신을 찾고 있다. 목격자를 제거하고 도망가라는 명령이었다. 안 돼. 그럴 순 없어. 정국은 프로그램의 명령을 거부했다. 머릿속에선 계속해서 사이렌이 요란하게 울려댄다. 안 돼. 형을 다치게 할 수 없어. 정국의 의지는 확고했다. 프로그램과 의지의 충돌은 정국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 충돌은 굉장히 불쾌하고 고통스러웠다. 프로그램의 연산작용으로만 움직이는 보통의 안드로이드와 달리 정국은 자신의 의지가 있었고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게 어떤 마음인지를 알고 있었다. 소중하게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정국은 프로그램에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다소 놀라기는 했지만, 정국은 언제나 지민에게 정국일 뿐이었다. 두려워해야 할 존재도, 위험한 존재도 아니었다. 지민은 주먹을 꽉 말아쥐고 있는 정국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눈에 보일 정도로 움찔거리던 정국의 떨림이 점차 멎어간다. 그 젖은 눈동자가 지민에게로 향했을 때 지민이 웃었다. 아주 환하게. 그 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정국의 눈동자에 각인되었다. 한 손은 여전히 정국의 손을 붙잡은 채로 다른 한쪽 손으로 지민은 정국의 머리를 다정한 손길로 쓰다듬었다.


“고생했겠네, 우리 정국이.”


무언가 울컥울컥 속에서부터 차올랐다. 가슴을 치고 올라온 응어리는 코끝을 찡하게 만들고 크고 둥근 눈망울 안 호수를 채웠다. 고개를 푹 숙이자 잔잔한 호수에 고인 물방울들이 천천히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한 방울. 또 한 방울. 뚝뚝 떨어진다. 지민의 자그마한 손이 정국의 볼에 닿았다. 정국이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물방울 진 세상이 일렁인다. 천천히 흘러내리는 눈물방울을 손으로 쓸어준 지민이 일부러 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정국이 울어? 왜 울어!”

“…킁. 형은, 형은 내가….”

“응. 응, 정국아.”


정국이 가만히 지민의 얼굴을 바라봤다. 입이 떨어지지 않아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지민은 차분히 정국을 기다려주었다. 킁. 한 번 훌쩍인 정국이 결심이 섰는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무섭지 않아요?”


정국의 볼을 만지작거리던 지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단 것처럼 크게 웃기 시작했다. 이씨, 웃지 말고요! 그 덕분에 긴장감이 모두 사라진 정국이 발을 쾅쾅 구르며 웃지 말라고 불만을 표했다. 허리까지 젖혀가며 웃던 지민이 웃느라 눈물이 고인 얼굴로 잡고 있던 정국의 얼굴을 가까이 잡아당겼다. 맞닿은 코끝을 비비며 지민이 대답했다.


“네가 왜 무서워. 이렇게 귀여운데.”


정국의 눈에서 멈춘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 퐁퐁 쏟아진다. 지민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주며 울지 말라는 듯 엉덩이를 토닥였다. 그러고 보니 정국이 우는 모습은 처음 봤다. 코끝이 빨개진 채로 그렁그렁 매단 눈물을 손등으로 문지르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지민은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왜 울어. 아, 귀여워.”

“아니, 기쁜데에….”


아하하. 정국의 말에 크게 웃음이 터진 지민이 웃음을 참느라 끅끅거리며 정국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간질거리는 진동이 뛰지 않는 심장을 파고들고 머리까지 지배한다. 지민의 등을 꽉 끌어안은 정국이 지민의 머리 위로 자신의 턱을 올려놓곤 잉잉 우는 소릴 냈다.

정국을 마주 안은 지민이 느릿느릿한 손길로 등을 토닥여주자 정국의 상태가 조금씩 진정되기 시작했다.

울음을 멈춘 정국이 코를 훌쩍이며 아직도 웃느라 정신없는 지민을 입을 삐죽이며 내려다봤다.


“웃지 마요….”

“정국이 너무 귀엽다.”

“아, 진짜….”

“기쁜데에….”

“아이참!”

“기쁜데 왜 울었어?”


자신을 따라 하며 놀리는 지민 때문에 씩씩거리던 정국이 답답하다는 듯 별로 크지 않게 소리쳤다.


“너무 기쁘니까요! 막 가슴 한쪽이 벅차고 그러니까….”


자꾸 놀리는 지민 때문에 서러워졌는지 다시 방울방울 지기 시작하는 정국의 눈물에 지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허둥거렸다.


“미안해, 미안해. 안 할게. 응? 울지 마.”


다시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는 정국의 볼을 잡고 요리조리 흔든 지민이 까치발을 살짝 들고선 복숭아처럼 분홍빛으로 물든 정국의 뺨 위에 입을 맞췄다. 정국이 아직 풀리지 않았다는 듯 삐진 티를 내며 입을 툭 내민 채 시선을 내리깔았다.


“정국아.”

“왜요.”


으이구. 퉁명스러운 대답에 정국의 말랑한 볼을 한 번 꼬집었다 놓은 지민이 틀어진 정국의 고개를 바로 해 자신을 바라보게 하였다.


“사실 너의 정체가 어떻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

“나한테 너는 그냥 너야. 그러니까 막 그런 거 걱정 안 해도 돼. 무서워할 필요도 없어. 알겠지?”

“…네. 알겠어요.”


정국의 얼굴 위로 서서히 미소가 번진다. 아이, 착하다. 머리를 쓰다듬으려는데 허리가 잡히더니 번쩍 들어 올려졌다. 지민은 반사적으로 정국의 목을 끌어안았다. 지민을 품에 안아 든 정국이 이제 자기보다 조금 위쪽에 있는 지민의 입술 위로 입 맞췄다.

계속해서 입을 맞추며 정국은 천천히 침실로 향했다. 여전히 혼을 쏙 빼놓는 키스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등 뒤로 푹신한 침대가 닿았다. 잉잉 울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여유 넘치는 얼굴의 정국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자 지민은 새삼스럽게 방망이질 치기 시작하는 심장에 얼굴이 발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오늘은 중간에 안 그만둘 거예요.”


심장을 때리는 통보를 남기고 정국은 지민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은 채 둥글고 우아하게 떨어지는 지민의 목덜미로 입술을 묻었다.

 


*     *     *


 

지민은 노곤하게 풀어져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은 정신을 붙잡고 꼬물꼬물 정국의 품 안으로 파고 들어갔다. 너의 이야기가 궁금해, 정국아. 잠이 묻어나는 지민의 목소리에 잠시 고민하던 정국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 눈을 뜨던 순간부터 연구소에서 도망치던 그 날까지. 그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지민은 울고 있었다.


“왜 울어요?”


정국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지민의 눈물을 훔쳐주며 물었다. 지민은 빨개진 눈가로 정국을 바라보며 연신 그 이름을 불렀다. 정국아. 네. 정국아. 네, 형. 정국아…. 기어코 흐느끼는 지민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품에 당겨 안은 정국이 아까 울던 자신을 지민이 달래주던 것처럼 토닥토닥 등을 쓸어내려 줬다. 이제 아픈 일 없을 거야…. 형이 지켜줄게…. 정국의 품속에서 웅얼거리던 지민이 얼마 지나지 않아 색색 규칙적인 숨소리를 뱉으며 잠들었다. 정국은 한참이나 잠든 지민의 등을 토닥이며 지민의 얼굴을 바라봤다.

 


*     *     *

 


지민은 찌뿌둥한 허리를 손으로 통통 두드리며 비장한 얼굴로 책상 앞에 앉아 보고서의 다음 페이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게, 막 그러니까…. 패기 넘치게 쓰려고 한 건 좋았는데 막상 쓰려고 하니 도저히 낯뜨거워서 쓸 수가 없었다. 침대에 누워서 옷을 벗…. 아니야, 아니야. 백스페이스를 마구 누른 지민이 결국 백지가 된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다. 머리를 너무 쥐어뜯어서 이러다가 머리카락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무슨 기능에 대한 후기가 필요하단 건지 지민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게 뭐, 기대하는 그런 거지. 좋으면 좋다고 알아들으면 되는 거 아니야?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제 막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정국은 성인용 안드로이드 모델도 아니었다. 알고 보니 그 모델이 아니라서 저는 못 쓸 거 같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으면 참 좋겠지만, 그렇게 되면 ‘제가 아주 특별한 안드로이드와 살고 있어요!’하고 광고하는 꼴이었기에 절대 말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지민에게 남은 것은 얌전히 보고서를 쓰는 것뿐이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눈 딱 감고 쓰면 되는 거야. 알겠지? 부지런히 자기 최면을 걸며 마음을 다잡고 첫 글자를 쓰려는데 쪽지가 도착했다는 팝업이 튀어 올랐다. 진짜 기껏 마음 잡았더니 누구야. 보나 마나 발신인은 재민 아니면 팀장일 것이다.


「지민씨, 회의실로 지금 와주세요.」


역시나 팀장에게서 온 쪽지였다. 회의실? 갑자기 웬 회의실이야. 툴툴거리며 지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 말이 있으면 팀장실로 불렀을 텐데 다른 일이 있는 건가? 지민의 의문은 바로 다음 순간 없어졌다. 낯익은 남자가 회의실에서 지민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

“두 번째죠, 우리?”


영진이었다. 지민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영진이 앉으라며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지민이 쭈뼛거리며 영진의 맞은편에 앉았다. 저번 미팅에서 뭐 문제가 있었던 걸까. 갑자기 영진이 찾아온 이유를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영진은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지민에게 내밀었다. 지민이 내밀어 진 서류와 영진을 번갈아 봤다. 계약서였다.


“저번에 이걸 빼먹었더군요. 나이가 들다 보니 이제 깜빡깜빡해요. 괜히 귀찮게 한 건 아니죠?”

“아, 아닙니다!”


어차피 자리에 있었어도 또 한 글자도 쓰지 못하고 머리만 뜯고 있었을 것이 뻔했다. 지민은 계약서를 한 번 확인한 후 확인되었다는 의미로 사인을 남겼다.


“이거 때문에 직접 오신 거예요…?”


그냥 서류만 보내도 됐을 일인데 직접 찾아온 것이 의아했다. 그런 지민의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영진이 웃으며 몸을 앞으로 기울이더니 작게 속삭였다.


“주변에 무슨 일 없어요?”

“네? 그게 무슨….”


다짜고짜 주변에 무슨 일이 없냐니. 지민은 당황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지민의 반응으로 보건대 아직 찾아내지 못한 듯했다. 영진은 사실대로 말을 해줘야 할지, 말해준다면 어디까지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비록 한 번 본 사이였지만 지민은 어딘가 믿음이 가는 구석이 있었다.


“우리 회사 안드로이드를 구매하셨다고.”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영진이 앞으로 당겨 앉았던 몸을 다시 뒤로 물렸다. 아, 네. 지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때요?”

“좋습니다.”

“후기 글도 작성하고 계시고.”

“아…. 네.”


누구 덕분에요. 이를 악문 채로 지민이 웃으며 대답했다. 영진이 눈을 날카롭게 빛내더니 지나가는 말인 척 물었다.


“지민 씨는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사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지난번에는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냐고 묻더니 이번에는 사랑이었다. 참 생뚱맞은 아저씨네. 그렇게 생각하며 지민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도 될 수 있고, 사랑도 할 수 있다. 기계잖아요. 입력된 정보로만 행동하는.”

“그래도…. 대화도 통하고 또….”

“정서적 교감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나요?”

“…박사님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허허.”


지민의 역질문에 영진이 한 방 맞았다는 듯 웃었다.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던 걸 취소해야 할 것 같았다. 지민은 잔뜩 경계심을 담은 눈으로 영진을 바라봤다. M사의 수석 연구원. 그런 사람이 안드로이드와의 정서적 교감을 자꾸 물어오는 것이 어딘가 수상했다. 어쩌면 정국에 대해 알고 있거나 관련이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영진을 처음 만났던 날 영진의 명함을 뚫어지라 바라보던 정국의 모습이 스치듯 생각났다.


“저한테서 뭘 알고 싶으신 거예요?”


이미 지민에겐 그가 클라이언트라는 사실은 중요치 않았다. 경계심을 가지고 움츠러든 지민은 다가가면 금방이라도 할퀴고 도망갈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냥 젊은 사람 생각이 궁금했을 뿐입니다.”


영진이 사람 좋게 웃었지만, 지민은 그 웃음을 믿을 수 없었다. 영진은 묻지도 않은 말을 주절주절 늘어놓으며 가방에서 종이를 꺼내 지민에게 빠르게 건넸다. 지민은 의아한 얼굴로 영진이 건넨 종이를 펼쳐보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영진은 말을 멈추지 않았고 지민은 눈치껏 영진의 말에 맞장구 쳐주며 종이를 펴 읽어보았다.


「연구소에서 당신들을 찾고 있습니다. 위험할 수 있어요.」


지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영진을 바라봤다. 실없는 소리를 하며 허허 웃고 있었지만, 그 눈빛만큼은 날이 서 있었다.


「저희를 어떻게 알고 찾아냅니까? 지금 가장 못 미더운 것은 박사님입니다.」

「경찰까지 불렀으니 찾는데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내가 못 미덥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거 하나만 알아주세요. 당신 옆의 그 아이는 제게 자식과도 같은 아이입니다.」


지민은 영진이 쓴 글을 읽으며 어젯밤 정국이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눈앞에 있는 M사 수석 연구원 최영진. 정국을 만든 박사. 두 사람이 동일 인물임을 깨달았을 때 지민은 고슴도치가 가시를 세운 것 같은 날선 경계를 조금 느슨하게 풀었다. 지민이 경계를 푼 것을 간파한 영진이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이야기가 잘 통하는 청년을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네요. 조만간 식사라도 한 끼 했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하하호호 식사를 하자는 뜻이 아니란 것이 아님을 지민은 알고 있었다. 영진은 분명 어떤 식으로든 연구소의 눈을 피해 연락해올 것이다.


“아, 물론입니다. 저야 영광이죠, 박사님.”

“그러면 다음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조심히 가세요.”


나오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을 끝으로 영진이 회의실을 떠났다. 지민은 영진이 사라진 회의실에 잠시 앉아있다가 필담을 했던 종이를 주머니에 쑤셔 넣은 후 회의실을 나섰다.

그대로 자리가 아닌 화장실로 향한 지민은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칸 안으로 들어가 필담을 한 종이를 꺼내 북북 찢은 후 변기에 넣고 물을 내렸다. 종이가 쓸려 내려가는 것을 보고 나자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이 느껴졌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만 느껴졌던 일이 영진과의 만남 이후 무게를 가지고 지민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지민은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지켜주겠다고 약속했으니까. 연구소에서 곧 찾아낼 거라는 영진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정국과 만난 후 제법 시간이 지났는데 최근이 되어서야 세상에 알려지고 경찰까지 나선 것을 보면 연구소 측에서도 정국이 폐기되지 않았음을 최근에야 알았거나, 혹은 알았는데도 찾지 못하는 이유가 있거나 둘 중 하나라는 가설이 세워졌다. 늦게 알았다고 하더라도 주문 정보를 조회해보면 쉽게 찾을 수 있었을 텐데 아직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 더 이상했다. 분명 조력자가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지민은 영진을 믿기로 했다. 지금 상황에서 생각할 수 있는 조력자는 영진뿐이었으니까.

 


자리로 돌아간 지민은 보고서는 뒷전이고 영진에 관한 이야기를 정국에게 해줘야 할지 말지에 대해 고민했다. 영진은 영진이 할 수 있는 한에서 정국을 도와줬지만, 정국에 입장에선 폐기 처분하라는 소장의 말이 있던 순간 영진이 자신을 외면한 기억이 더 강하게 남은 모양이었다. 거기다 대놓고 가짜니 대체품이니 같은 소리를 들었지 않았는가. 굳이 좋지 않은 기억을 들추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연구소 측은 경찰까지 동원하여 정국을 찾고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벅찰 것을 알았기에 더 신경 쓸 일을 구태여 안겨주고 싶진 않았다. 지민은 당분간은 정국에게 영진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럼 이제 뭘 해야하지? 지민은 지금 자신의 머릿속만큼이나 하얀, 아무것도 없는 보고서 창을 바라봤다.

 


*     *     *


 

내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것이 사라지자 여유가 찾아왔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여유인지 모를 일이었다. 정국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집안을 바삐 돌아다녔다. 심지어 로봇 청소기와 마주쳤을 때 적대감을 보이지 않고 움직이는 길에 장애물이 있으면 치워주기까지 했다.

편하게 소파에 앉은 채 솜이 퍼져서 납작해진 쿠키를 품에 안고는 TV를 켰다. 지민은 TV를 보지 말라고 했지만, 정국은 어떻게 상황이 흘러가는지라도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더는 불안하거나 무섭지 않은 것이 컸다. 옆에 지민이 있어 줄 것을 알았기에 더 그랬다. 지민이 오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있었으니 정국은 TV 소리를 배경음 삼아 다이어리를 꺼내 들었다.

어제는 지민이 쓰지 못했으리라 생각했는데 언제 쓴 건지 어제 날짜로 지민의 일기가 짧게 쓰여있었다. 코끝이 찡해졌다. 정국은 품 안의 쿠키를 더 꽉 끌어안았다.

 

x월 x일

사랑해, 정국아. 이제 둘이니까 외롭지 않을 거야.

 

정국은 소용돌이치는 모든 감정을 다음 장에 꾹꾹 눌러썼다. 시인처럼 멋들어지게 표현하고 싶었지만 영 쉽지 않았다. 몇 번 고쳐 쓰다가 포기한 정국이 그냥 솔직하게 튀어나오는 대로 쓰기 시작했다.

 

X월 X일 조금 흐림

형. 아프진 않아요? 그래도 좋았죠? 나는 좋았는데. 벌써 형이 보고 싶어요. 매일매일 계속 같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건 내 욕심이겠죠? 욕심부리고 싶지 않은데 생각처럼 그게 잘 안 돼요. 사실 어제 다 말을 못했는데 형이 혹시 나를 무서워할까 봐 많이, 많이 무서웠어요. 그래서 형이 그렇게 말해줬을 때 너무 기뻤어요.

나는 형을 아껴주고 싶고 지켜주고 싶어요. 근데 형도 나를 지켜준다고 했잖아요. 형도 나랑 같은 마음인 거죠?

오늘 TV에서 ‘넌 내 세상의 전부야!’라면서 고백을 했는데…. 나한텐 형이 정말 세상의 전부예요. 그래서 형이 없으면 내 세상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꼭 지켜줄게요. 사랑해요.

 






매일같이 뉴스에선 탈출한 안드로이드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뉴스뿐만이 아니었다. 온갖 시사프로그램과 인터넷에서도 연일 화제였다. 개발 중인 안전성 검증을 받지 않은 안드로이드라는 정보 외에는 무슨 용도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그 어떤 정보도 없었기에 무능한 기관과 연구소에 대한 비난의 화살과 정말 그런 안드로이드가 존재하기는 하는지에 대한 갑론을박이 지겹도록 펼쳐졌다. 음모론도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국가에서 비밀리에 무기로 안드로이드를 개발한다는 말이 있어요.”

“오래전부터 있었던 음모론이죠. 그런 증거 없는 소설들을 다 믿으시는 건 아니죠?”


정국은 무료하게 소파에 앉아 천장만 바라보다 TV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여러 가지 이슈들을 주제로 패널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시사 토론 프로그램이었는데 마침 ‘M사 안드로이드 사건’이 이번 주제인 듯했다.


“그런 허무맹랑한 음모론과는 다르죠. 이번 사건을 보세요. 연구소 측은 어떤 안드로이드인지조차 제대로 설명을 못 하고 있지 않습니까? 대체 뭘 만들었길래 그냥 검증 전의 안드로이드라고만 얼버무리냔 말이죠.”

“정말 말 그대로 검증 단계 전의 안드로이드 일 수도 있는 거죠. 그것뿐인데 뭘 어떻게 더 설명하겠습니까?”

“거참, 답답한 양반이네. 안드로이드가 스스로 탈출을 했다니. 이게 뭘 뜻하는 건지 진짜 모르셔서 그렇게 안일한 생각을 하십니까?”


열을 내며 말을 주고받는 두 명을 정국이 흥미롭다는 듯 바라봤다.


“무슨 뜻은 무슨 뜻이요. 연구소의 경비가 허술하여….”

“M사 정도 되는 기업 연구소의 경비가 허술하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차치하더라도 기존의 안드로이드와는 무언가 다르니까 이런 일이 발생한 거 아닙니까. 연구소는 이 다른 점이 무엇인지 밝힐 의무가 있습니다. 뭐가 얼마나 위험한지도 알리지 않은 채 이렇게 손 놓고 있는 행위는 절대 용납받을 수 없는 거죠.”


재밌네. 자신의 존재를 두고 갑론을박을 펼치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정국의 흥미를 끌었다. 좀처럼 이견이 좁혀지지 않는 두 남자는 핏대까지 세워가며 자기 할 말을 하느라 바빴다. 상대방의 말을 들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만약에 대량학살이 가능한 살상용 병기라서. 그런 게 밖을 버젓이 돌아다니고 있는 거라면. 사고라도 난다면 어떻게 책임지시겠습니까?”

“아니, 그걸 제가 왜 책임집니까? 그리고 대량학살 병기를 국가 연구원도 아닌 기업의 연구소에서 만든다니요!”


순식간에 무시무시한 살상용 병기가 되어버린 정국이 코믹 영화라도 보는 듯 킥킥거리며 웃었다. 쿠키야. 진짜 웃긴 소리 한다, 저 사람들. 토론 시간이 지날수록 정국의 정체는 점점 더 무시무시한 이미지가 되어 가고 있었다.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인간이란 조금만 자신과 달라도 틀렸다고 생각하곤 하지.’


바보들의 행진 같은 토론을 보고 있으니 문득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한때 정국의 세상 전부였던 작은 방 안에서 영진이 했던 말이었다. 당시의 정국은 영진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특별한 너를 틀렸다고 할지도 모른단다.’


정국은 영문도 모른 채 고개를 끄덕였었다. 영진의 입에서 나오는 특별하다는 말이 좋았다. 그리고 그 특별함이 칼날이 되어 폐기 명령이 내려왔을 때도 정국이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고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주문처럼 속삭여졌던 영진의 말 때문이었다.


‘그래도 흔들리지 말렴. 너는 틀린 게 아니라 특별한 거니까.’


그리고 좁은 방안에서 탈출하여 넓은 세상으로 나왔을 때 정국은 그와 같은 말을 해주는 사람을 또 만날 수 있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는 틀리지 않아. 이상한 게 아니야. 그냥…조금 특별한 거라고 해두자.’


자신의 품 안에서 꼬물거리며 지민이 해줬던 말이었다. 넌 나에게 너무 특별한 존재야. 그렇게 말하며 웃는 얼굴이 너무 예뻐서 정국은 참지 못하고 말랑한 얼굴 곳곳에 입을 맞췄었다.


“자, 뭐가 되었던 연구소 측의 적절한 입장발표는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시점입니다. 또 이제 살펴보면 실제로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거짓 발표가 아니었나, 하는 의견들도 있어요. 일종의 쇼라는 거죠.”


과열된 분위기를 진정시킨 사회자가 ‘M사 안드로이드 사건’과 관련된 다른 시각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얼굴까지 빨갛게 달아올라 말을 주고받던 두 사람이 조용해진 사이 가만히 앉아있던 여성 패널이 한층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시작한다.


“노이즈 마케팅의 일종일 수도 있다는 의견들도 적지가 않죠.”

“그렇게 생각하시는 뭐 명확한 근거라거나 그런 게 있으십니까?”

“M사가 굴지의 안드로이드 전문사라는 것과 곧 출시될 신상 모델과 관련해서 보면 사실 지금 M사가 굉장히 주목을 많이 받고 있거든요. 최대 기업이라곤 하나 다른 기업에서도 또 우수한 성능의 안드로이드들을 내놓고 있다 보니까 노이즈 마케팅이 필요한 시기긴 하죠.”

“그래도 M사는 안드로이드 시장에서는 빼고 논할 수 없는 점유율을 가지고 있는 회사입니다.”

“맞습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팩트죠. 근데 요새 워낙 보급형이라거나 해서 기능이 그렇게 부족하지 않은데 더 저렴한 모델이라거나. 차별화된 무언가를 가진 제품들이 경쟁사에서 많이 나오고 있어요. 실제로 주가들을 확인해도 알 수 있습니다.”

“노이즈 마케팅의 효과를 M사가 많이 볼 수 있다고 보십니까?”

“실제로 빅데이터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M사와 관련 안드로이드들이 속보가 나간 이후로 급증한 걸 확인할 수 있고요. 반응이 나쁘지가 않아요. 새로운 걸 개발을 했는데 뭔지는 모르겠지만, 기존과는 다르고 엄청 대단해 보이거든요. 실제로도 지금 무슨 살상용 병기다, 뭐 이런 무시무시한 말들이 나오잖아요?”


잠자코 있던 ‘M사가 개발한 것은 살상용 병기다.’라고 주장하던 남자가 끼어들었다.


“아까부터 말씀드리지만. 정말 위험한 걸 만들어서….”

“아직 제 말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계속하겠습니다.”


남자의 말을 자른 여성이 하던 말을 이어 계속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공포심과 함께 호기심을 가지게 됐죠. 정말 뭘 만들고 있었을까? 관심이 집중되는 겁니다. 이러다가 상황이 수습되고 신모델이 발표되면 또 관심이 쏠리겠죠. 그리고 아주 결정적인 사실 하나를 놓치고 계시는 게 있습니다.”

“그게 뭐죠.”


사회자가 흥미롭다는 듯 여성 패널에게 질문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요란하게 뉴스 속보까지 나오고 경찰도 수사를 착수한다고 난리인데 정작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어요. 아까 말씀 열심히 하셨던 내용. 살상용 병기. 무시무시하죠. 그런데 누가 죽었나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뉴스에선 계속 찾고 있다는 말을 매일같이 하고 있지만, 현실은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말씀을 정리하자면. 실제로는 탈출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뭐 이런 말씀이신 겁니까?”

“일어났을 수도 있어요. 정말 별거 아닌 사소한 일이.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이 지나치게 평화로운 일상이 노이즈 마케팅의 핵심이라는 거죠. 아까 데이터를 다 보셨지만 지금 아주 많은 사람이 M사와 탈출 안드로이드에 관한 관심을 표하고 있어요. 그것도 긍정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의 비율이 더 높고요. 만약에 정말 위험한 안드로이드였어서 누군가 다치거나 죽는 그런 최악의 사건이 발생했다고 했을 때는 이야기가 또 달라지겠죠.”

“그건 정말 마케팅보단 노이즈에 초점이 맞춰지는 상황이죠.”


사회자가 허허 웃었다. 정국은 입까지 작게 벌린 채로 어느샌가 여자 패널의 말에 빠져 들어있었다. 정말 연구소에선 그냥 마케팅의 일종으로 이런 일을 벌인 게 아닐까 하고 설득당할 것 같았다.


“그래서 이 평화야말로 연구소 측 고도의 노이즈 마케팅이지 않나. 저는 그렇게 보고 있는 겁니다.”


현장 방청객들 사이에서 박수가 터져 나온다. 한 시간 남짓의 시간 동안 처음으로 나온 박수였다. 물론 집에서 TV로 보고 있던 정국도 여자 패널의 말이 끝나자 열렬하게 물개 박수를 쳤다. 적어도 세 명의 패널 중에선 가장 멀쩡한 주장을 뚜렷하게 잘 말한 사람이었다. 심지어 그 대상인 정국조차도 여성의 말이 사실이라고 믿을 정도였으니.

집중해서 본 토론회가 끝나고 슬슬 저녁이나 만들까 하던 정국이 시간을 확인하곤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매일같이 칼퇴근하는 지민이 곧 돌아올 시간이었다. 정국은 다른 걸 준비하기엔 시간이 없으니 간단하게 볶음밥이나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곤 빠르게 재료들을 꺼내왔다. 이제 요리하는 모습이 제법 능숙해져 있었다.

 


*     *     *


 

놀라울 정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시간은 흘렀다. 이쯤 되면 토론회 여성 패널의 말대로 노이즈 마케팅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정국보다도 더 불안해하던 지민조차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정국과 평소와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일상에 슬슬 긴장의 끝을 놓아가는 중이었다. 이대로만 가면 영영 우리를 찾지 못하고 끝나지 않을까. 그런 태평한 생각마저 들었다.

여전히 정국과 지민은 눈이 마주치면 입을 맞추고 휴일엔 서로를 꼭 안은 채 침대 위를 뒹굴었다. 그러다 불꽃이 튀는 날에는 침대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는 때도 있었다.

지민은 낯뜨거운 보고서 작성에 어느 정도 적응했는지 빨개진 얼굴로 몸을 비비 꼬며 썼다 지우는 단계를 벗어나 제법 사무적인 태도로 쓸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 전혀 다를 것 없는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보니 연구소 일은 흐릿해져 갔다. 사람들의 반응도 점점 시들시들해지는 시점이었다.

그렇게 연구소와 영진의 말을 머리 한구석에 밀어 꺼내보지 않기 시작했을 때 불쑥 사건은 발생했다.

그날따라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데 사무실이 소란스러웠다. 무슨 일인가 궁금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자신과는 관련이 없는 일이라고 단정 짓고 자리에 앉아있던 지민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영문도 모른 채 사무실 입구로 불려 나갔다.


“누구시죠?”


인상이 험악해 보이는 남자 한 명과 비교적 부드러워 보이는 남자 한 명, 이렇게 총 두 명이 지민을 기다리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지민은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느꼈다. 머리 한구석에 밀어두었던 연구소가 자네들을 찾는다는 영진의 말을 허겁지겁 꺼내왔다.


“얼마 전에 M사에서 안드로이드 구매하셨죠?”

“네.”

“배송이 잘못 오셔서 문의하셨고요.”

“네.”

“지금 떠들썩한 사건 아시죠? M사 안드로이드랑 관련해서.”

“네. 근데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죠? 아직도 해결이 안 된 건가요?”

“아, 그냥 확인차 조사하고 있습니다. 오배송 자들이랑 관련이 있어서요.”

“아…. 그러시구나. 제가 뭘 더 도와드리면 되죠?”


괜히 불안해하거나 당황해서 화를 내면 더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았기에 지민은 벌렁거리는 심장을 꾹꾹 누른 채 수사에 협조하는 선량한 시민으로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지민의 연기실력이 뛰어났던 건지, 아니면 정말 참고차 온 것이 맞았는지 형사들은 몇 가지를 질문하곤 시간 내줘서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자신을 의심한다거나 그런 기색은 없었으나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계속 찜찜했다. M사 같은 대기업에서 다른 것도 아닌 안드로이드 오배송을 일으킬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몇 없는 오배송 자들을 파고들다 보면 걸리는 건 시간문제일 것 같았다.


“무슨 일이에요?”

“안드로이드 탈출이랑 관련해서 조사하시나 봐요.”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해주곤 지민은 자리에 앉아 작은 머리를 바쁘게 굴렸다. 영진으로부턴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지민은 지금 갈림길 앞에 서서 고민 중이었다. 영진을 믿고 기다릴지, 아니면 스스로 움직일지.

지난 번부터 영진은 한 발 먼저 움직여왔다. 연락이 없는 지금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지민은 곰곰이 생각했다.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정말 아무 일도 아니라서 영진으로부터 연락이 없는 것이거나 그게 아니면 영진도 연락하지 못하는 상황이거나. 감시를 당한다거나 구금을 당했다거나…. 머리를 휙휙 저어 나쁜 생각을 쫓아낸 지민이 초조하게 입술을 물어뜯으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했다. 그냥 영진을 믿고 기다리기엔 머리가 차갑게 식고 등골이 싸한 것이 안 좋아도 너무 안 좋았다. 본능이 말해준다. 지금 자신과 정국이 굉장히 위험하다고.

 


*     *     *


 

지민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가진 현금이란 현금은 모조리 인출 하였다. 일부러 사람이 잘 다니지 않은 외진 곳을 찾았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돈을 뽑은 지민이 여전히 주변을 잔뜩 경계하며 걸음을 옮겼다. 집과는 제법 떨어진 곳이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도 겁이 나서 지민은 두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였다. CCTV로 자신의 움직임을 찾지 못하도록 골목골목 한참을 돈 끝에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주변에 혹시 자신을 수상하게 여기는 이는 없는지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집으로 들어간 지민은 마중 나온 정국의 손목을 잡고 방으로 향했다.


“형?”


언질도 없이 갑자기 늦게 돌아온 지민의 상태가 딱 보기에도 평소와 달랐다. 오래달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숨을 헐떡이며 땀에 젖은 머리를 넘기는 지민의 모습이 너무 다급해 보여서 정국은 영문도 모른 채 방으로 끌려 들어와 짐가방을 꺼내는 지민을 묵묵히 바라봤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지민의 행동이 무얼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폐기 처리하라는 소장의 눈빛이 떠올랐다. 그렇게 쉽게 놓아줄 사람이 아니었다. 달콤한 일상에 취해서 다 잊었었나 보다. 쫓기고 있는 신세라는 것을.

정국은 바쁘게 움직이는 지민을 도와 짐 싸기를 끝냈다. 짐가방 두 개를 한구석에 놓은 후 지민은 모자 두 개를 챙겨 하나는 정국에게 씌워주고 자신도 푹 눌러썼다. 옷을 갈아입을 시간도 없이 급하게 움직였다. 한마디 말도 없이 이대로 정국과 단둘이 사람들의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떠날 생각이었다. 잃는 것도 많겠지만, 그 모든 것을 다 더해도 정국 하나만큼의 무게가 되지 못했다.

짐가방을 하나씩 나눠 든 정국과 지민은 조심스럽게 집을 빠져나왔다. 겨울이라 해가 빨리 져서 다행이었다. 문제는 어디로 가야 하며 어떻게 이동하냐였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기엔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생각해보자.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일단 터미널을 가서 다른 지역으로…. 영진의 명함 속 번호로 연락해볼까? 그러나 영진에게 연락하기엔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지민은 영진이 모르쇠 하는 중이라거나 사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쪽보단 영진이 감시당하는 중이라거나 같은 이유로 연락을 취하지 못한 것이 더 타당하다 생각했다. 만난 것은 두 번, 그마저도 길게 만난 것이 아니었지만 영진에겐 묘한 신뢰가 갔다. 정국이 자식 같은 아이라는 말을 하는 영진의 눈빛이 진중해 보였기 때문이리라.

초조해하는 지민을 정국은 말없이 안아주었다. 심각한 와중에도 정국의 온기가 닿자 웃음이 났다. 백 마디 말보다도 힘이 되었다. 기운 차려서 일단은 택시라도 타야겠다는 생각으로 움직이려는데 차 한 대가 두 사람의 앞을 막아섰다. 벌써 찾아왔나? 잔뜩 경계를 한 채로 여차하면 짐가방을 던지고 냅다 뛸 준비를 하며 차를 노려보는데 문이 열리더니 훤칠한 남자가 걸어 나온다.


“박지민 씨?”

“누구야?”


정국이 지민보다 먼저 물으며 지민의 앞을 막아섰다. 한 손은 지민의 손을 꽉 잡은 채였다. 차에서 내린 남자는 경계심 가득한 두 명을 무표정으로 바라보다 차 뒷좌석의 문을 열어주었다. 그러고는 여전히 자신을 노려보며 당장에라도 뛰어갈 준비를 하는 두 사람에게 허리 굽혀 인사했다.


“저의 이름은 T-002. 편하게 2호라고 부르십시오.”


T-002? 지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국도 마찬가지였다. 놀란 얼굴로 굳은 두 사람을 보던 2호는 정국과 지민이 도저히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직접 짐가방을 들어 트렁크에 실었다.


“아버지께선 움직이지 못하십니다. 당분간 지내실 곳을 구해뒀으니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믿어도 되는 걸까. 지민은 찬찬히 2호를 살폈다. 자신을 뜯어보는 시선에도 2호는 불쾌한 기색 하나 없어 보였다. 마치 그런 건 느끼지 못한다는 듯. 정국과 지민이 선뜻 차에 오르지 않자 2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영진의 편지를 꺼내 건넸다.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로 편지를 낚아챈 지민이 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에 의지한 채 편지를 살폈다. 익숙한 필체는 틀림없는 영진의 것이었다.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여러 가지 생각이 지민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고민하던 지민은 결국 차에 올라탔다. 어차피 2호를 믿지 못해서 도망간다고 해도 다른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일단은 믿어 보기로 했다. 2호에게서 묘하게 영진이 겹쳐 보이는 이유도 한몫했다.

정국은 여전히 못 미더운 얼굴이었지만, 지민이 먼저 차에 오르자 어쩔 수 없다는 듯 그 뒤를 따랐다. 2호는 두 사람이 차에 타자 곧바로 출발했다. 중형차는 요즘은 보기 드문 운전자가 직접 운전을 해야 하는 구식이었다. 핸들을 잡아 운전하는 2호를 지민이 신기하게 바라보니 2호는 별거 아니라는 듯 ‘자동주행차는 해킹당하기 쉬워서요.’라는 답을 들려주었다.

달리는 차 안에는 침묵만 감돌았다. 2호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고 정국과 지민은 갑자기 깨져버린 일상에 지쳐버린 참이었다.




묵묵히 운전만 하던 2호는 곧 한적한 주택가 사이에 차를 세웠다. 아직 재개발이 진행되지 않아 오래된 동네였다. 서울 내에서 최첨단과 가장 거리가 먼 동네. 어쩌면 숨기엔 최적의 공간일 수도 있었다. 차를 세운 2호는 지민에게 집 주소와 열쇠를 건네곤 혹시 모를 때 사용하라는 말을 덧붙이며 카드 한 장을 더 내밀었다. 머뭇거리던 지민이 카드까지 받아들곤 차에서 내렸다.

짐가방까지 꺼내 들고 트렁크를 닫자 2호는 별다른 인사도 없이 그대로 차를 몰아 사라졌다. 골목을 내려가는 차의 불빛이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던 지민과 정국은 적힌 주소를 찾아 움직였다. 작동을 제대로 하는지조차 불분명한 낡은 CCTV 한 대와 다 꺼져가는 가로등 하나만 지키고 있는 좁은 골목을 빠져나가자 그마저도 보이지 않는 외진 곳에 주소에 적힌 집이 있었다.

열쇠로 조심스럽게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의 주택이 두 사람을 반겼다. 꼭 동네 아이들이 폐가 체험을 위해 찾을만한 외관이었다.


“…귀신이 나오진 않겠죠?”


지민보다 한 발자국 뒤에 서 있던 정국이 조용히 물었다. 그 생뚱맞은 질문에 심각하던 얼굴로 서 있던 지민이 웃음이 터져 깔깔거렸다.


“무서워?”

“아니요.”


질문을 던진 지 1초도 되지 않아서 돌아오는 대답에 지민이 더 크게 웃었다. 이런 외관이면 어떠하고, 조금 불편하면 어떠한가. 함께인데. 마음이 편안해진 지민이 정국의 팔에 쏙 팔짱을 꼈다.


“들어가자. 형이 이렇게 팔짱까지 끼워줬으니까 무서워하지 마.”


정국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지민을 내려다봤다. 얼마 전 TV에서 공포영화를 봤던 것이 생각나 그냥 물었을 뿐인데 지민은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듯했다. 그게 아니라고 설명하고 싶었지만 무서워하지 말라며 옆에 찰싹 붙어 있는 지민이 좋았기에 해명은 그만두었다.

겉보기엔 끼익 거리며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열릴 것 같이 생긴 현관문은 보기와 달리 부드럽게 열렸다. 내부도 지나치게 깔끔했다. 전등도 어디 하나 깨지거나 깜빡이는 것 없이 잘 켜졌다.


“되게 바퀴벌레 득실거리게 생겨서 깔끔하네요.”


정국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의외라는 얼굴로 온기가 없어 싸늘한 집안을 돌아보며 말했다. 먼지도 없는 것이 청소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집 같았다.


“짐부터 풀까?”


집 안을 돌아다니며 구조를 파악한 후 지민이 말했다. 정국은 고개를 끄덕이곤 짐가방 두 개를 한 번에 들어 침실로 향했다.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는 밤이었다.


 

*     *     *


 

차를 타고 오는 길에 핸드폰을 꺼버렸기에 외부로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이 집안엔 없었다. 그 외의 필요한 것들은 대부분 집안에 갖춰져 있었기에 생활하는 것에 있어서 불편함은 크지 않았다. 처음 도망쳐 왔던 날의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어 본능적으로 출근할 시간에 눈을 뜬 지민은 낯선 천장에 잠시 멍하니 누워있다가 어젯밤 급히 도망쳐 왔음을 떠올렸다.

출근을 위해 지민을 깨우지 않아도 괜찮아서인지 정국은 아직 자고 있었다. 자신의 가슴을 가로지르고 있는 정국의 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침대에서 내려온 지민이 쭉쭉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했다. 아마 곧 꺼진 지민의 핸드폰으로 연락이 쏟아질 것이었다.

휴직계라도 내고 올 걸 그랬나…. 지금 와서 그렇게 생각해봤자 이미 떠난 기차였다. 어차피 냈어도 프로젝트 중에 뚜렷한 사유도 없는 휴직계가 받아들여질 리도 만무했다. 오랜만에 맞는 여유로운 아침이었다.

침대에 다시 걸터앉은 지민이 쌔근쌔근 잘 자는 정국의 앞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넘겨 주었다. 어젯밤 ‘어차피 내일 출근 안 하잖아요.’라며 자신의 위로 올라타던 얼굴과는 영 딴판인 얼굴이었다.

나도 좀 더 잘까. 출근 없는 아침이라니. 꿈만 같은 일이었다. 나중에 제자리로 돌아갔을 때의 후폭풍이 두렵기는 했지만. 아, 그 전에 돌아갈 수 있는지를 따져봐야 하나? 지민은 정국의 팔을 베고 누운 채로 생각했다. 이제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망설이지 않고 후회 없이 사랑할 것이다. 평생 숨어 살라고 해도 그럴 수 있었다. 말랑한 정국의 볼을 콕콕 찌르며 웃던 지민이 다시 몰려오는 피로감에 눈을 감았다.

 


*     *     *


 

눈을 떴을 땐 점심이었다. 으음? 아직도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코앞에 정국의 얼굴이 보였다. 정국의 예쁜 눈에 오래 잔 탓에 부은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아직 비몽사몽 한 귓가로 정국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형.”

“으응…?”

“왜 이렇게 귀여워요?”

“무슨 소리야, 갑자기….”

“진짜 무슨 떡 같아요.”


귀여워. 그 말만 계속 반복하며 정국이 아직 정신없는 지민의 얼굴 곳곳에 입술 도장을 찍어댔다. 간지러어…. 웅얼거리며 품 안으로 파고드는 지민을 터질 듯이 꽉 끌어안았다. 매일 꿈 꾸던 둘 만의 세상이었다. 영진이 제공해준 이 집이 꼭 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사랑의 도피처처럼 느껴졌다. 지민은 숨이 막힌다면서도 정국을 마주 안았다. 따뜻한 온도가 기분 좋게 만들어주었다.

한참을 꼼지락거리며 한 몸인 것처럼 붙어 있던 둘은 지민의 배에서 울리는 소리에 떨어졌다. 지민이 부끄러운지 어색하게 웃으며 정국의 시선을 피했다. 눈치 없게 꼬르륵 울리는 배가 미웠다. 정국은 자신의 품에 계속안에 안겨 있느라 빨개진 볼을 하고서 입을 툭 내밀고 꿍얼거리는 지민의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아니…. 이게 왜…. 그렇게 배고픈 거 아닌데…. 허둥거리며 변명을 늘어놓는 모습을 꿀이라도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얼굴로 바라보던 정국이 지민의 납작한 배를 토닥였다.


“밥 먹어요.”

“…그럴까?”


배가 고프지 않다고 해놓고 막상 밥을 먹자니 좋아한다. 정국이 웃자 아차 싶었는지 지민이 다시 그렇게 배가 고픈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정국은 누가 뭐랬냐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곤 먼저 침대에서 내려와 지민을 일으켜주었다.

헐렁한 가운 하나만 걸친 지민이 움직일 때마다 살짝씩 드러나는 하얀 몸 곳곳엔 어젯밤 새로 새겨진 붉은 흔적들이 가득했다. 정국이 묘한 얼굴로 자신의 눈높이에서 내려다보이는 지민의 속살을 바라봤다.


“…왜 그렇게 봐?”

“ㄴ, 네? 안 훔쳐봤는데요?”

“누가 훔쳐봤데?”


허둥거리는 정국이 귀여워 지민은 더 놀려주고 싶었다. 은근슬쩍 스트레칭을 하는 척 몸을 이리저리 늘이고 휙휙 돌리자 가운을 여며주던 끈이 느슨해지며 살짝살짝 뽀얀 속살이 드러났다가 감춰지기를 반복했다. 빼꼼 드러났다 사라지는 살결에 정국은 입안이 바짝 말랐다. 항상 호수같이 깊고 반짝이던 정국의 눈에서 불길이 타오르는 순간을 지민은 가장 좋아했다. 발끝까지 저릿해질 정도로 짜릿한 감각이었다.

정국은 아랫배가 당기는 감각에 얼굴을 굳히고 지민의 얼굴을 뚫어질 정도로 응시했다. 지민은 정국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모르는 척 옷깃을 여미곤 새침한 얼굴로 돌아서 정국과 마주했다.


“밥 먹자.”


지민만 보면 꺼지지 않는 불꽃이 몸 안에서 타는 것만 같았다. 갈증이 났다. 평생 모르고 살았을 감각을 지민을 통해 배우고 느낀다. 지민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총총거리는 발걸음으로 정국을 지나쳐간다. 발끝까지 짜릿하게 만드는 시선이 따라붙는다.


“형.”

“응?”

“어차피 집에 아무것도 없어서 못 먹어요.”

“네가 먼저 먹자고 했잖아.”


지민이 새침하게 팔짱을 끼곤 정국을 돌아봤다. 이제 어쩔래? 갈증을 느끼는 것은 정국만이 아니었다. 지민의 눈꼬리가 사르르 접혔다. 정국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     *     *


 

해가 다 지고 나서야 침대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지민은 뻐근하게 아려오는 허리를 붙잡고 쉬지 않고 소리를 내느라 다 갈라진 목을 가다듬었다. 자고 일어나면 목이 다 쉬어 있을 것 같았다. 정국은 먼저 일어나 사부작거리며 옷을 다 주워입고 있었다.


“괜찮아요?”


상태 봐주지 않고 몰아붙일 때는 언제고 정국이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지민의 옆을 뱅뱅 맴돌았다. 다시 호수같이 맑고 반짝이는 눈동자로 돌아온 정국이 걱정스럽게 자신을 보는 기분이 나쁘지 않아 지민은 조금 더 과장을 보태서 엄살을 부렸다.


“아. 못 걷겠어.”

“그 정도예요?”


정국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지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정국을 향해 팔을 벌렸다. 정국이 반사적으로 냉큼 다가와 자석이 맞붙듯이 지민을 꽉 끌어안았다. 정국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지민의 등허리를 쓸었다. 정국의 목을 끌어안고 매달리다시피 한 지민이 정국의 어깨에 턱을 올려놓은 채로 작게 투정부렸다.


“나 배고파아….”

“뭐 사올까요?”


정국은 지금 당장 지민이 딸기밭에 가서 딸기를 따오라고 해도 군말 없이 나갈 것 같은 기세였다. 지민은 진정하라는 듯 아까 자신이 잡아당기는 바람에 엉망이 된 정국의 뒷머리를 정리해주었다.


“안돼. 위험해.”

“어차피 아무도 제 얼굴 몰라요.”

“그래도 안 돼. 같이 가.”

“그러고 어딜 가요.”


정국이 지민의 허리를 내려다봤다. 지민이 어딜 보냐는 듯 찰싹 정국의 가슴팍을 아프지 않게 때렸다. 정국이 억울하다는 듯한 얼굴로 지민을 본다. 푸흐흐. 말랑한 정국의 볼을 잡고 만지작거리던 지민이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손뼉 대신 정국의 볼을 찹 소리 나게 때렸다.


“업어줘.”

“업히고 싶어요?”

“그러고 나가면 되잖아. 너 혼잔 절대 안 돼.”

“알겠어요. 업어주는 건 상관없는데….”


정국이 말꼬리를 흐리며 지민의 차림새를 훑어봤다. 여전히 가운 한 장을 걸친 채였다.


“그러고 나갈 거예요?”

“오자마자 변태라고 동네방네 소문날 일 있어?”


지민이 훌렁 가운을 벗어 내린다. 가운 안은 맨 몸이었기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벗은 몸이 갑자기 나타나자 정국이 화들짝 놀라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새삼스럽게 내외해?”

“아, 아니, 그래도 그렇게 막 훌렁훌렁 벗고 그러면.”

“방금까지도 다 봐놓고선. 이제 눈 떠도 돼.”


눈을 가렸던 손을 치우자 대충 편안한 차림의 옷을 챙겨 입은 지민이 서 있었다. 목폴라를 만지작거리며 정돈한 지민이 마지막으로 모자를 푹 눌러쓰곤 정국에게도 씌워줬다.

바람이 제법 매서운 날씨였기에 옷깃을 단단히 여민 지민이 출발하자며 손짓한다.


“안 업혀요?”

“농담이었어. 괜찮아, 걸어가도.”


그리고 지민은 그 말을 집에서 나오고 딱 10분 후에 후회하게 된다. 낡은 동네에서도 깊숙한 곳에 있는 집은 근처에 흔한 편의점 하나 없었고 마트도 제법 멀리 떨어져 있었다. 길에도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어 정말 사람이 살긴 하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그냥 업혀요.”


조금씩 속도가 느려지는 지민에 정국이 무릎을 굽히고 등을 내밀었다. 지민은 이번엔 군말 없이 탄탄한 등 위로 업혔다. 단단히 지민의 다리를 받쳐 잡은 정국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섹스 후의 노곤함 때문인지 편안한 정국의 등 때문인지 지민은 꾸벅꾸벅 졸다가 결국 잠을 이기지 못하고 정국의 어깨에 볼을 댄 채로 잠들었다.

규칙적으로 귓가에서 들려오는 지민의 숨소리에 정국이 피식 웃었다. 그냥 혼자 다녀와도 되는데. 제법 단호하게 혼자는 절대 안 된다고 말하던 지민이 떠올랐다. 전혀 위협이 되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진심이 느껴지는 얼굴이었기에 정국은 지민의 말을 따르기로 한 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걱정하는 지민이 좋았다. 예뻐 보였다.

 


*     *     *


 

마트에 도착할 때까지 잠들어 있던 지민은 웅성거리는 소음과 눈이 아플 정도로 밝은 마트 조명에 눈을 떴다. 헉, 언제 잠들었지? 혹시 자다가 침이라도 흘린 것은 아닌가 빠르게 정국의 어깨를 확인했지만, 다행히도 그런 흔적은 없어 보였다. 뒤에서 지민이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것을 느낀 정국이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일어났어요?”

“응. 나 언제부터 잤어?”

“글쎄요. 업히고 한 3분 있다가?”


세상에. 대체 언제 잠든 거야…. 걸어가겠다고 큰소리칠 땐 언제고 업히자마자 잠든 꼴이라니. 괜히 부끄러워서 이마를 어깨에 문지르자 정국이 괜찮다는 듯 지민의 몸을 고쳐 업으며 위아래로 반동을 준다.


“이제 내려줘.”

“왜요? 계속 업혀있어요.”

“아, 아니…. 다 쳐다보잖아.”


다 큰 남자를 업고서 둥기둥기 달래는 꼴이라니. 이쪽을 힐끔거리는 시선에 지민은 도저히 얼굴을 들 수가 없어서 정국의 어깨에 얼굴을 푹 묻은 채 조용히 말했다. 제발 내려달라고. 한참을 웃던 정국이 지민을 내려주기는커녕 업은 채로 마트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뭐하는 거야! 내려줘!”

“싫어요.”


지민이 필사적으로 버둥거렸지만, 정국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허리도 성치 않아 힘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말을 해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이는 정국은 지민을 업은 채로 마트 안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녔다. 보다 못한 지민이 정국의 목을 꽉 끌어안은 후 콱 뒤로 당겨 졸랐다. 정국에겐 효과가 없는 일이었지만, 이쯤 놀렸으면 많이 놀렸다는 생각에 정국은 지민을 땅에 내려주었다.


“너…!”

“아까 나 놀린 복수예요.”

“아니, 놀리긴 내가 언제 놀렸다고….”

“아. 취소취소. 놀린 게 아니라 유혹한 건가?”


뭐, 뭐? 이쯤 되니 지민은 아기 토끼 같은 얼굴로 주변을 맴돌며 형, 형 하는 것이 진짜 정국인지 아니면 지금처럼 당장에라도 품에 안기고 싶은 자극적인 얼굴이 진짜 정국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빨리 가요. 시간 늦었다.”


정국이 멍하니 있는 지민의 손을 붙잡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자주 나오진 못할 것 같으니 최대한 많이 사서 돌아갈 생각이었다. 아침을 잘 먹지 않는 지민을 위해 시리얼도 사고 식빵도 샀다. 그 외 각종 식재료로 카트가 하나둘 채워져 갔다. 신중하게 재료를 담고 있으면 꼭 자신이 넣지 않은 게 하나씩 늘어나 있었다. 정국은 또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마시멜로 봉지를 안고 돌아오는 지민을 볼 한쪽을 혀로 밀어 툭 튀어나온 채 바라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장보기에서 가장 힘든 것은 지민을 말리는 일인 것 같았다.


“자꾸 뭘 들고 오는 거예요.”

“먹고 싶어, 이거.”

“간식 많이 샀잖아요.”

“이거만 더 사자.”


그리고 그보다 더 문제는 더 사자며 말하는 지민에게 완강하게 안 된다고 말을 하지 못하는 자신이었다. 정국은 카트에 하나둘씩 늘어나는 주전부리들을 텅 빈 눈으로 바라봤다.

결국, 몸통만 한 비닐봉지 두 개를 들고서야 마트를 나설 수 있었다. 지민은 배가 고팠는지 계산하자마자 봉지 안을 부스럭거리며 뒤지더니 어묵바를 찾아 입에 물었다.


“나도 하나 들까?”


봉투 두 개를 든 정국에게 지민이 하나를 달라는 듯 손을 뻗었지만, 정국은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거나 먹어요.”


턱짓으로 어묵바를 가리킨다. 지민은 알겠다며 순식간에 어묵바 하나를 뱃속으로 집어넣고는 하나 더 꺼내 들었다. 지민이 종일 굶었다는 사실이 새삼 와 닿아서 정국은 조금 미안해졌다. 밥을 먹지 않아도 되는 자신과 지민은 다른데. 다음부턴 섹스할 때 하더라도 밥은 먹으면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둘에게 남아도는 것이 시간이었다.

 


*     *     *


 

괜한 기우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모든 것이 잠잠했다. 매일 뉴스를 챙겨봤지만, 탈출한 안드로이드와 관련된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다. 사람들의 관심도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아예 다른 지역으로 떠나 버리면 영영 정국을 쫓는 이들이 찾아오지 못할 것 같았다.

솔직한 마음으론 이대로 영원히 둘만 함께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누구의 간섭도, 관심도 없이 오직 서로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삶. 서로가 세상 전부인 삶을 떠올리던 지민이 피식 웃었다. 영진이 주었던 카드로 현금을 찾을 수 있는 만큼 찾아 둘이 도망가 버릴까. 실행에 옮기지 못할 일이란 걸 알면서도 그런 상상을 하는 것은 즐거웠다. 지민이 혼자 샐샐 웃고 있으니 정국이 다가와 물었다.


“무슨 생각하길래 그렇게 웃어요?”

“네 생각.”

“…이렇게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게 어딨어요.”

“응?”


정국의 생각을 하고 있어서 그렇게 답했을 뿐인데 어째서인지 정국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다.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던 지민이 곧 와하하 웃음을 터뜨린다.


“근데 진짜 네 생각 하고 있었는걸.”

“…나도 맨날 형 생각밖에 안 하는데.”

“똑같네? 이리와.”


정국이 얌전히 지민의 품에 안겼다. 지민은 자신보다 몸집이 큰 정국을 품에 안고 등을 토닥였다.


“이대로 영원히 둘만 있었으면 좋겠다, 그치.”


정국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느껴졌다. 희망대로만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현실은 도망자의 신분이지만 지금 이 순간은 숨어 사는 것이 아니라 단둘만 떠난 긴 휴가라고. 언젠간 마주해야 할 현실이 있었지만, 지금은 미뤄두고 싶었다.


“다 잘 될 거야.”

“알아요.”

“일이 다 해결되고 나서도 돌아가지 말까?”

“…….”

“싫어?”

“그건 아닌데….”


정국이 품에서 빠져나오더니 지민을 마주 봤다. 싫을 리가 없었다. 일상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대로 단둘이 있는 것은 정국이 꿈꾸는 일이기도 했다. 지금 망설이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형도 형의 삶이 있잖아요.”


지민이 행복했으면 좋겠으니까. 정국은 조심스럽게 지민의 표정을 살폈다. 지민은 웃지도 울지도 않는 표정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아리송했다. 정국은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정국아.”


지민이 정국의 손을 붙잡는다. 지민의 온기가 닿자마자 거짓말처럼 걱정이 사라졌다. 정국은 내리깔았던 시선을 들어 지민을 바라봤다.


“네가 내 행복이야.”

“…그래두.”


지민이 미소진 얼굴로 고개를 젓는다. 미소 띤 얼굴과는 달리 그 움직임은 제법 단호했다. 정국은 더 깊게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 대신 지민을 보며 웃었다. 지민도 정국을 보며 마주 웃는다. 정국은 그대로 지민의 몸을 당겨 품에 꽉 끌어안았다.


“사랑해요, 형.”

“응, 나도.”

“정말….”

“사랑해, 정국아.”


행복 뭐 별거야? 이런 게 행복이지. 그렇게 생각하며 지민은 정국을 안은 팔에 더 힘을 주었다. 함께라 따뜻한 온기만큼 두근거리는 심장의 진동도 전해지기를 기도하며 지민은 눈을 감았다. 부디 매일이 오늘만 같기를.

 


*     *     *


 

당분간은 마트에 가지 않아도 될 정도로 장을 봐온 탓에 먹을 것도 부족하지 않았고, 그 외의 생활에 필요한 것은 대부분 집 안에 있었기에 굳이 집 밖으로 나갈 일이 없었다.

처음 며칠은 눈만 마주쳐도 입술을 맞대고 몸을 겹쳤지만, 계속 집 안에만 있으니 슬슬 답답해졌기에 정국과 지민은 해가 지고 난 후에 종종 집을 나서 집 근처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두 손을 꼭 마주 잡은 채였다. 동네는 두 사람을 제외하곤 거주하는 사람이 없는 듯 고요했다. 처음 몇 번은 혹시 싶은 마음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주변을 잔뜩 경계하며 걸어 다녔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사람 그림자 한 번을 구경하지 못하자 긴장이 풀려 이제 제법 자유롭게 다니게 되었다.

어느 정도 주변 지리에 익숙해지고 나선 매일 다른 골목을 따라 걸었다. 발걸음이 닿는 대로 걸으면서도 낡은 동네를 빠져나가지 않기 위해 주의를 기울였다. 그러다가 이제는 전국에 몇 개 남지 않았다는 공중전화 박스를 발견했다. 집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수화기를 든 지민이 주머니에서 찾아낸 동전을 집어넣었다. 지민은 영진의 치밀함에 감탄했다. 어쩌면 자기 생각보다도 더 오랫동안 영진은 이런 사태를 대비해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민은 이미 외워버린 영진의 명함 속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수화음이 가는 시간이 1초가 1분 같았다. 초조하게 영진이 전화를 받기를 기다리는데 달칵 소리와 함께 수화음이 멎었다.


“여, 여보세요?”


수화음이 가는 동안 지민의 머릿속에 가득하던 ‘실수로 번호를 잘못 눌렀거나 영진이 통화하지 못하는 상황이거나 모종의 이유로 번호를 바꾼 경우’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 영진은 이 의문의 번호가 누구로부터 걸려온 것인지 안다는 듯 아주 자연스럽게 답했다.


— 집은 좀 어떻습니까. 살 만하죠?

“네. 그보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날 어떻게….”


어떻게 2호가 알고 찾아왔냐는 거였다. 영진은 별일 아니라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경찰이 찾아갔다는 소릴 들었어요. 그래서 2호를 보낸 겁니다. 지민 씨는 그날 바로 움직일 것 같아서요.

“…이제 어떻게 하면 됩니까?”

— 그건 둘이서 정할 문제이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은신처까지 마련해 두신 걸 보면 분명 무슨 생각을 하고 그러셨을 거 같은데.”

— …당분간은 거기 머무십시오. 사회적으로 관심도가 낮아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두 사람을 쫓는 이들이 있으니.

“언제쯤 쫓는 사람들이 사라질까요?”

— 아마도 평생.


영진의 목소리가 한층 더 무겁게 느껴졌다. 지민은 입술을 꽉 감쳐 물었다. 각오하고 받아들이기로 한 일이었지만 막상 직접 들으니 가슴이 꽉 막히는 것 같았다.


— 평생 쫓겨야 할 수도 있습니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 직접 갈 수는 없지만,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2호를 통해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지민 씨도 필요한 일이 있으면 여기로 연락을 주시면 됩니다. 상황이 바뀌게 되어도 2호를 보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통화를 오래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이만 끊어야 할 것 같습니다.

“잠, 잠시만요!”


전화를 끊으려던 영진을 지민이 다급하게 불렀다. 이게 맞는 일인가 싶긴 했지만, 이미 2호가 자신을 T-002라고 소개한 순간부터 정국 또한 영진이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니 한 번쯤은 직접 이야기를 하도록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민은 얌전히 전화 부스 밖에 서 있는 정국에게 손짓했다.

왜요? 정국이 입 모양으로 물으며 좁은 부스 안으로 들어왔다. 지민이 수화기를 내밀었다. 정국이 가만히 수화기를 내려다봤다. 거절한다면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계속 수화기를 내려다보고만 있는 정국에 그냥 자신이 받고 통화를 종료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손을 거둬가는데 정국이 수화기를 건네받는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은 정국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영진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가만히 듣고만 있는 정국의 표정이 불쾌해 보이진 않아서 지민은 한시름 놓았다. 정국은 간간이 ‘네. 아니요.’ 같은 대답만 이어갔다. 이렇게라도 통화를 하게 되어 다행이었다. 지민이 흐뭇한 얼굴로 정국을 바라봤다.


“…네.”


여태 표정 변화 없이 가만히 듣기만 하던 정국이 입술을 한 번 꽉 깨물더니 속삭이듯이 작게 말하곤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감사해요.”


정국의 통화가 끝나자 지민은 잘했다는 듯 정국의 엉덩이를 토닥여주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정국이 희미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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