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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제로 디그리 完

소년이 어른이 되어


지민이 눈을 뜬 것은 익숙한 병원의 침대 위였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기운이 없었다. 멍하니 규칙적으로 떨어져 내리는 링거를 바라봤다.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 있지. 지민은 팔에 꽂힌 링거 바늘을 뽑아냈다. 바늘이 꽂혀있던 곳에서 피가 퐁퐁 새어 나왔다. 차라리 콸콸 쏟아졌으면 좋겠다. 온몸의 피를 다 쏟아내는 거야. 영원히 눈을 뜨지 않아도 되도록.


“어머, 환자분!”


간호사가 놀라 뛰어온다. 링거를 다시 점검하고 꽂으려는 것을 지민이 거절했다. 몸을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힘겨웠다. 간호사는 안 된다며 다시 눕히려고 했지만, 지민이 제발 보내달라며 애원하자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침대에 걸터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지민은 그렇게 한참을 숨죽여 울었다. 간호사가 조심스럽게 지민의 마른 등에 담요를 덮어준 후 병실을 빠져나갔다.

한참을 웅크려 울던 지민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말에도 지민은 막무가내였다. 괜찮다며 퇴원을 요구하는 지민은 쓰러지지 않는 것이 용해 보이는 상태였다.


“여기서 이러는 데 힘을 더 쓰는 거 같으니까 그냥 퇴원시켜 주세요. 정말 괜찮습니다. 집에…돌아가고 싶어요.”


결국, 지민이 이겼다. 지민의 사정을 아는 병원 사람들은 안쓰러운 얼굴로 퇴원 절차를 도와주었다. 지민은 고맙다며 인사를 하곤 병원을 나섰다. 날씨가 유난히 좋았다. 지민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 간혹 지민을 알아본 사람이 힐끔거리기는 했지만, 그 외에는 모든 것이 평소와 다름없었다. 세상이 무너진 것은 지민 하나뿐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을 받았던 안드로이드 하나 사라진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대중에겐 그저 스쳐 지나가는 흥밋거리 중 하나였으며 일상으로 돌아가면 잊을 일이었다. 자신도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상으로의 복귀가 가능했다면.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모든 일이. 한낱 꿈이었다면 모두 잊을 수 있을까? 지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꿈이라도 정국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걷고 또 걷다 보니 집 앞이었다. 막상 집에 왔지만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현관문을 열지 못하고 한참을 그 앞에서 서성이던 지민이 눈을 질끈 감고 비밀번호를 눌렀다. 텅 비어 있는 집은 엉망진창이었다. 따뜻한 공기와 고소한 냄새 대신 차가운 공기가 지민을 반겼다. 당장에라도 정국이 뛰어나올 것 같았다. 형, 오늘은 찌개 끓였어요. 형, 오늘은 일찍 왔네요? 아침에 찌개 먹고 싶다고 했잖아요. 나 예뻐요? 지민은 참지 못하고 현관에 주저앉아 몸을 둥글게 말았다. 울음소리가 목에 턱 걸린 것처럼 터져 나오지 못하고 가슴 안에서 맴돌며 몸 안에서부터 지민을 썩어들어가게 하였다.

집안에 들어갈 기운도 엄두도 나지 않았다. 지민은 벽에 기댄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흘린 눈물을 모두 모으면 작은 욕조를 하나 채울 수 있을 정도였다.


“형.”


얼마나 그렇게 웅크리고 있는지 가늠도 되지 않는 시간이 지났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민이 덜덜 떨리는 손을 꽉 말아쥔 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정국아…?”

“왜 울어요. 내가 울지 말랬잖아.”


지민과 시선을 맞추기 위해 웅크려 앉은 정국이 울지 말라는 듯 웃어 보인다. 지민이 덜덜 떨리는 손을 뻗었다. 정국아. 정국아. 그러나 손끝에 닿는 것은 없었다. 분명 여기 있는 데 여기 없었다.

허억. 지민은 눈을 번쩍 떴다. 꿈이었다. 꿈을 꾸는 동안에도 흘러내린 눈물을 훔치며 지민이 어둠이 내려앉은 집안을 바라봤다. 도망치듯 집을 빠져나가고 처음으로 다시 돌아왔던 집은 이미 엉망이었다. 뭘 찾기라도 한 듯 다 뒤집힌 서랍장과 엉망진창으로 옷장에서 꺼내져 바닥을 구르는 옷들에 발 디딜 곳도 없는 상태였다. 치울 생각은 당연히도 하지 못했다. 곧바로 정국을 돌려받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집을 청소할 겨를이 없었다. 형, 우리 청소부터 해야겠다. 어디선가 또 정국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민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천천히 집 안으로 향했다. 엉망이 된 거실 사이를 휘청이며 걸어간 지민은 탁상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던 액자를 집어 들었다. 세상 누구보다 행복해 보이는 두 사람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 형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날 이후 단 하루도 지민의 머릿속에서 떠난 적이 없는 목소리였다. 지민의 손에서 액자가 떨어져 내린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닥을 구르는 액자를 두고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작은 유리 조각이 밟히는 것이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채 지민은 무릎을 끌어안고 몸을 웅크렸다. 잇새로 울음 섞인 말들이 엉망으로 쏟아져 나왔다. 어떻게, 행복해. 내가. 정국아. 내가…, 너 없이, 어떻게, 너 없이. 내가…국아, 정, 국아…. 울지 말라는 다정한 목소리는 이제 없었다.

한참을 숨죽여 울던 지민은 흐려지는 정신을 겨우 붙잡고 홀린 듯이 침실로 향했다. 정국과 처음 집을 떠나는 날 이후로 들어간 적 없는 공간이었다. 정국이 가득한 공간이라서, 도무지 발을 들일 용기가 나지 않았었다. 당장 문을 열면 정국이 침대에 누워 자신을 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침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지민은 그 자리에 다시 무너져 내렸다. 팔 한쪽이 떨어져 너덜거리는 쿠키가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다. 지민은 거의 기다시피 침대로 가 쿠키를 품에 안았다. 먼지 냄새가 났다.

 

 


꿈속에서 지민의 품 안에 안겨 있는 건 쿠키가 아닌 정국이었다. 정국이 지민을 바라보며 짓궂게 웃는다.


― 형 얼굴 완전 찐빵이다.

“…정국아.”


목소리가 잠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지민은 이대로 정국이 가버릴까 무서웠다. 정국이 눈을 동그랗게 뜨곤 지민의 볼을 붙잡았다.


― 왜 울어요, 형? 내가 찐빵이라 그래서 그래요? 미안해요, 안 놀릴게. 형이 너무 귀여워서 그랬어요.


아니, 아니야. 그게 아니야. 지민은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했으나 나오는 건 공기 소리뿐이었다. 정국이 지민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곤 부볐다. 정국이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행동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지민은 코를 한 번 훌쩍이곤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정국이 그제야 배시시 웃는다. 그대로 지민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곤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 이제 가야 해요.


안 돼. 가지 마. 정국아. 제발. 나오지 않는 목소리에 지민은 목을 자신의 목을 긁다가 정국의 옷깃을 붙잡았다. 정국은 슬픈 얼굴로 피 묻은 지민의 손끝을 바라보았다.


― 형이 아프지 않고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

― 갈게요.

“…마. 가지 마, 정국아….”


울음과 함께 터져 나온 지민의 목소리에 정국은 곤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옷깃을 붙잡은 지민의 손 곳곳에 입을 맞춘 정국이 서서히 멀어진다.

까무룩 기절하듯 잠이 들었던 지민은 어젯밤 침대에 걸쳐서 쿠키를 앉았던 그 자세 그대로 눈을 떴다. 집 안은 여전히 엉망이었고 자신은 여전히 혼자였다. 지민은 차라리 영원히 눈을 뜨지 않기를 기도했다. 이대로 존재가 사라졌으면 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너를 만나러 갈 수 있을까, 정국아. 말라붙은 눈물길을 따라 다시 눈물이 흘렀다. 부은 눈가가 쓰라렸지만, 지민은 개의치 않았다.




지민은 정말 이대로 사라지길 원하는 사람처럼 아무것도 먹지 않고 침대에 누워있기만 했다. 약해져 있던 몸은 먹는 것이 없으니 자꾸 축 늘어졌다. 며칠이 지났는지 날짜 감각조차 없었다. 하루 대부분을 잠을 자는 일에 사용했다. 꿈엔 항상 정국이 나왔다. 지민은 점점 꿈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꿈엔 정국이 있으니까. 현실에 없는 정국을 만날 수 있으니까. 현실이 아닌 걸 알면서도 붙잡고 싶었다.


― 왜 또 왔어요.

“정국아.”

― 이제 그만 와요, 형.

“보고 싶었어. 많이.”

― 조금 전에도 봤잖아요.


정국이 곤란하다는 듯 눈썹을 팔자로 휜다. 지민은 고개를 저으며 정국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정국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작은 등을 토닥여주었다.


― 왜 이렇게 말랐어요. 밥은 먹고 있어요?

“나는 너만 있으면 돼, 정국아.”

― …형이 그러면 제가 속상해요. 왜, 왜 이렇게 엉망이 됐어요. 나는 형이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정국아.”

― 네.

“정국아.”

― 네, 형.

“…네가 없는데 내가 어떻게 행복해.”


정국의 눈동자가 슬픔으로 물들어갔다. 지민은 답이 없는 정국의 옷깃을 붙잡고 하염없이 울었다. 울지 말라고 했는데. 눈물이 멈추질 않는다. 정국이 조심스럽게 지민의 눈물을 닦아주며 얼굴을 들어 자신을 보게 했다.


― 형이 울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울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내가 또 형을 울게 하는 것 같아요.

“아니야….”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슬픈 얼굴을 하고선 정국이 웃었다. 지민은 떨리는 손으로 정국의 뺨을 쓸었다. 정국이 지민의 손 위로 제 뺨을 비빈다.


― 나 안 잊을 거죠?

“그럼. 당연하지.”


지민은 울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히힛. 정국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지민은 웃었다. 정국이 인사를 하는 듯 눈을 깜빡인다.


― 사랑해요.


다음 순간 지민은 텅 빈 침대에서 홀로 눈을 떴다. 홀로 남은 침대에 꼭 정국의 온기가 남아있는 것 같아 지민은 한참 동안 빈자리를 쓸었다. 더는 울지 않았다. 이상할 만큼 몸도 가벼웠다. 침대에 일어나 앉은 지민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요했다. 세상에 홀로 남은 것만 같았다. 잠만 자느라 기력이 떨어질 때로 떨어진 지민이 다시 눈을 감으려는데 벨소리가 울렸다. 그 비현실적인 상황에 지민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꿈이 아니라는 듯 벨소리는 끈질기게 울려댔다. 지민은 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거기 있었는지조차 몰랐던 휴대폰이 울리고 있었다. 전화를 받을지 잠시 고민하는 동안 벨소리가 끊긴다.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기 무섭게 휴대폰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 …….


상대편은 말이 없었다. 지민은 그 침묵 속에서 전화를 건 이가 누군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식을 또 잃는 기분은 어떠세요, 박사님.”

― …….

“아니, 진짜 자식도 아니었나요? 그럼 뭐였어요? 대체품? 대체품으로 생각하기라도 했어요?”

― T-001은….

“그런 이름으로 부르지 마요. 박사님한텐 그저 말만 자식인 안드로이드였을 지도 모르겠지만, 저한텐 아니었습니다.”

― 지민씨.

“저는 정국이 안 잊을 거예요.”

― 모두 불가피한 일이었고….

“불가피한 일이요. 뭘 위해서요? 박사님의 명예?”

―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보상을 할 겁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그런 게 다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에요? 그때 저한테 왜 물어보셨어요? 안드로이드랑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냐고.”

― …….

“박사님은 정국이 잊으셔도 돼요. 근데. 근데 저는 절대 안 잊을 거예요. 못 잊어요. 이만 끊겠습니다.”

― 지민….


지민은 영진의 말을 더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심호흡을 하며 화를 가라앉히는데 문득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던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엉망이 된 책상 위에 누군가 뒤늦게 올려놓은 모양새처럼 이질적인 것이 하나 섞여 있었다. 지민은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향했다. 다이어리였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찾을 수 없었던 것이 갑자기 눈앞에 불쑥 나타났다.

지민은 다이어리를 들고 침대로 돌아와 첫 장부터 읽기 시작했다. 이미 한 번 본 거였지만 몇 번이고 곱씹었다. 정국이 남긴 마지막 기록이라 생각하자 더더욱 그랬다.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책장을 넘기다 보니 꼬박 하루가 지나있었다. 다이어리를 읽고 또 읽기를 반복하던 지민은 마지막 장을 넘기는 순간 너무 흘려 마른 줄 알았던 눈물이 또 흐르기 시작했다. 가슴에 응어리진 채 밖으로 나오지 못하던 소리도 새어 나온다. 끅끅거리며 울던 소리가 점차 커지고 종국에는 숨까지 헐떡이며 울음을 토해냈다.


x월 x일. 바람이 조금 부네요.

형. 이걸 쓰는 것도 마지막이겠네요. 잠깐 쓰게 해달라고 부탁드렸어요. 그리고 꼭 형에게 돌려달라는 것도요. 형이 나 때문에 울진 않을까 걱정돼요. 그러면 내가 너무 슬플 거 같은데. 울지 마요. 이제 내가 닦아줄 수 없잖아요.

기억해요? 형을 만난 건 내 삶에 있어서 기적이었다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사실 모르겠어요. 그냥, 그냥 울지 마요. 알겠죠? 집에 먼저 돌아가 있으면 뒤따라 갈게요. 난 괜찮아요, 정말로. …사실은 형을 이제 못 본다고 생각하면 조금 안 괜찮아요. 그래도 형은 괜찮아야 해요. 시간이 다 되었대요. 마지막으로…몇 번을 말해도 너무 부끄러운 거 같은데…. 사랑해요.


눈물이 떨어진 자리가 번져 얼룩이 지기 시작했다. 지민은 손등으로 벅벅 눈가를 닦아냈다. 여러 번 읽느라 너덜거리기 시작한 다이어리를 안은 채 지민은 몇 번이고 사랑한다는 말을 되뇌었다.

 

 




지민은 집에 돌아온 이후 처음으로 부엌으로 향했다. 우유도 유통기한이 지나있었기에 맨 시리얼을 그릇에 담고 조금씩 입에 넣는데 오랜만에 들어가는 음식물을 몸이 거부하는지 자꾸 헛구역질이 나왔다. 그래도 지민은 꿋꿋이 시리얼을 씹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정국이 그러기를 바랄 테니까.

꾸역꾸역 시리얼을 다 먹은 지민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갑자기 삶의 목적을 상실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뚜렷한 목적 없이 산 것은 정국을 만나기 전도 마찬가지였는데 도무지 그땐 어떻게 살았는지가 기억나지 않았다.

멍하니 소파에 앉아있는데 초인종 소리가 났다. 지민이 의아한 얼굴로 현관 쪽을 바라봤다. 올 사람이 없는 집이었다. 지민이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현관으로 향했다. 문을 열어도 될까. 밖에 누가 있을까. 조심스러운 손길로 현관문을 열었다. 살짝 열어서 살펴본 밖은 걱정이 무색하게 아무도 없었다. 다시 문을 닫으려는데 열린 문의 뒤쪽으로 거대한 무언가가 놓여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지민의 몸집만 한 상자였다. 지민은 지금 밖에 놓인 박스와 똑같은 것을 이전에 본 적이 있었다.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지민은 거대한 박스를 집안으로 질질 끌고 들어왔다. 처음 정국을 만난 날도 이랬다. 지금 눈앞의 것과 같은 크기, 같은 색, 같은 무게의 상자가 집 앞에 놓여있었다.

지민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뜯었다. 포장을 뜯고 닫혀있는 상자의 날개 부분을 잡아 뜯듯이 열자 처음 그 날처럼 같은 자세로 얌전히 상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정국이 보였다. 지민은 지금 자신이 꿈을 꾸는 것인가 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환상이라도 보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몇 번이나 눈을 비비고 봐도 상자 안에 있는 것은 틀림없는 정국이었다. 문득 영진과의 통화가 떠올랐다.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보상. 헛웃음이 났다.

지민이 복합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상자 안의 안드로이드가 눈을 떴다. 허탈한 얼굴의 지민과 눈이 마주치자 안드로이드는 말갛게 웃었다. 꼭 처음 본 그 날처럼.


“안녕하세요, 주인님?”


정국을 처음 만난 날이 생각나서 지민은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했다. 결국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지민을 정국이 묘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정국과 같은 커스텀의 안드로이드를 M사 측에서 보상으로 보내줬을 거란 생각을 하니 더 허탈하고 서러워졌다. 정국과 똑같은 얼굴을 보니 순간적으로 반가웠던 자신이 미워졌다. 언젠가 정국이 했던 말대로 안드로이드란 건 언제든 대체할 수 있다는 말 같아서였다. 그게 아니었는데. 대체할 수 있는 그런 게 아니었는데…. 서러움에 훌쩍임을 멈추지 못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지민은 자신이 이제 환청까지 듣나 싶어 여전히 훌쩍이는 얼굴로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멀리 볼 필요도 없었다. 안드로이드가, 아니 정국이 웃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지민이 멍하니 정국을 바라봤다. 한참을 웃던 정국이 집 안을 둘러보더니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짓고선 지민의 앞에 섰다.


“완전 엉망이잖아요.”

“…정국아?”

“응, 나 정국이에요. 집도 엉망이고. 형도…. 울지 마라니까 왜 이렇게 얼굴이 상했어요. 밥두 안 먹었죠.”

“마, 말도, 말도 안 돼….”

“나 가사용 아닌 거 알죠? 완전 비싼 몸인데. 이렇게 집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으면 어떡해요?”

“진짜 정국이야? 진짜?”


정국이 이상한 소리를 한다는 얼굴로 지민을 내려다봤다.


“그럼 가짜 정국이도 있어요?”


어느새 눈물은 그쳤다. 정국이 지민을 꽉 끌어안았다. 갈비뼈가 부서질 것 같은 힘이었다.


“보고 싶었어요.”


귓가에 속삭여지는 목소리는 틀림없는 정국의 것이었다. 지민이 머뭇거리고 있으니 정국이 다그친다.


“뭐해요? 나도 안아줘요. 먼저 집에 가 있으면 따라간다고 했잖아요.”


지민이 정국의 품에 안긴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선 있는 힘을 다해 정국의 등을 끌어안았다.


“다녀왔습니다.”

“…어서 와.”







Epilogue

 

진석의 의뢰 사항은 성공적으로 제작되었다. 진석이 기억하는 약혼녀와 성격까지 흡사한 안드로이드가 완성되었다. 진석은 원하는 것을 말해보라 했다. 영진은 드디어 때가 왔음을 느꼈다. 어쭙잖은 바꿔치기로는 평생 도망치지 못할 것이다. 영진은 영원히 정국을 연구소로부터 해방해줄 계획을 세워왔고, 드디어 그 계획을 실천할 때가 찾아온 것이다.

계획을 실행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최대한 많은 사람이 정국이 폐기되었음을 기억하는 것이었다. 영진은 정국을 무조건 폐기해야 함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영진의 과거를 아는 이상 폐기 요청은 쉽게 받아들여졌다. 소장은 영진이 부디 제정신으로 돌아왔길 바란다고 했다. 영진은 소장의 말이 그저 우스웠다. 그 말대로 자신은 미쳐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제정신으로 돌아가기 위해 제 자식을 죽일 일은 없다는 거였다.

순조롭게 모든 일이 영진의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사람이 정국에 대해 기억하고, 그가 폐기되었음을 기억하는 일이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지민에게조차 알리지 않았던 계획이었는데 지민은 마치 계획을 안다는 듯 영진이 계획을 수행함에 큰 도움이 되는 일을 했다. 지민이 올렸던 글은 파급력이 컸고, 덕분에 많은 사람이 정국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가짜를 진짜인 것처럼 폐기하는 것뿐이었다.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앞에서 폐기된 안드로이드가 살아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지민이 저도 모르게 자신의 계획에 도움을 주느라 바쁜 동안 영진은 진석의 도움을 받아 아주 은밀하게 정국과 같은 커스텀의 바디를 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적당한 시기에 여론을 뒤집는 것에도 성공했다. 보도자료는 물론 스스로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마다치 않았다. 모든 일은 막힘없이 이루어졌다.

모든 계획의 마지막 단계가 이루어지기 전 진석은 영진에게 물었다. 후회하지 않겠냐고. 영진은 그 어느 때보다 호탕하게 웃었다.


― 후회할 일이었으면 처음부터 시작하지도 않았습니다.

― 자네의 딸을….

― 제가 딸을 잃은 건 안드로이드 때문이죠. 이사님. 그렇지만 그걸 제가 원망만 하고 있다고 해서 뭐가 바뀌겠습니까.

― …….

― 죽은 이는 살아 돌아오지 못합니다. 저는 과거에 머물기보단 나아가는 길을 택했을 뿐입니다.

― 자네가 후회하지 않는다면 약속은 약속이니 끝까지 도와줘야지.


진석의 충실한 수행 비서들은 미리 제작해 두었던 가짜 정국과 진짜 정국을 감쪽같이 바꿔치기했다. 그렇게 바꿔치기 된 가짜가 온 국민이 보는 앞에서 메모리칩을 뺏기는 동안 영진은 정국을 자신의 연구실로 데려와 상태를 점검하고 몇 가지 기능들을 더해주었다.

이제 정국을 지민의 품에 돌려보내 주는 일만 남았다. 정국은 검사를 받는 내내 말이 없었다. 영진도 굳이 말을 걸지 않았다.



모든 점검이 끝나고 박스 안에 들어가면서 정국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영진을 불렀다.


“아버지.”

“…….”

“감사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정국은 눈을 감았다. 진석은 박스를 봉한 후 2호와 함께 직접 운반할 준비를 했다. 모두가 정국이 폐기되었다고 생각할 때였다.

영진은 지민의 집 앞에서 지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따지자면 곧 깜짝 선물이 도착할 예정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데 생각지도 못한 지민의 날 선 반응에 영진의 뜻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듯했다. 허허. 전화를 끊은 영진이 통화가 끊긴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평생 정국을 잊지 않겠다는 지민의 목소리를 들으니 먼 훗날 현재 자신의 선택이 큰 문제가 될지라도 지금의 순간을 후회할 일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진은 비밀리에 정국이 담긴 상자를 지민의 집 앞에 배달했다. 문을 두드리고 그곳을 빠져나오는 것으로 자신이 할 일은 이제 모두 끝났다.


“서운하십니까?”


차로 돌아오니 2호가 물어왔다. 영진은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예쁘다고 계속 품에 안고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니겠나. 각자의 자리가 있는데. 2호는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이제 자신이 할 일은 정국의 행복을 빌어주는 것. 그것뿐이었다.■

 




다시 한 번 제로 디그리가 끝이 났네요. 제로 디그리를 쓸 수 있어서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정말 보내주어야할 때가 온 거 같아요.

안녕, 제로 디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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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제로 디그리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