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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 쿨 시그널


지민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눈을 번쩍 떴다. 처음 보는 천장이 눈에 들어온다. 필름을 잘라서 이어붙인 것처럼 어젯밤 어느 시점 이후로 눈을 뜨기까지가 온통 깜깜했다. 끊긴 기억과 눈을 뜨니 보이는 낯선 천장. 깜빡깜빡.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는 눈동자가 눈꺼풀에 덮였다 드러난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뻣뻣하게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낯선 천장과 낯익은 얼굴. 이대로 쾅 터져서 사라지고 싶었다.

뻣뻣하게 누운 채 이제 익숙해지기 시작하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현실을 부정해도 결국은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지민은 옆에 누운 사람이 깨지 않게 조심하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헐벗은 몸이 드러나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깊게 잠든 듯 깨지 않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지민은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술 같은 거 마시는 게 아니었는데. 언제나 후회는 한 발 느리게 찾아왔다.

후회하고 있을 시간도 없었다. 지민은 남자가 깨기 전에 뱀 허물처럼 바닥에 늘어져 있는 옷가지들을 주워 입었다. 찝찝했지만 한가롭게 씻고 있을 시간도 없었다. 부디 태평양 같은 어깨를 드러낸 채로 단잠에 빠진 그도 자신처럼 기억 일부가 유실되었기를 빌며 지민은 조용히 모텔방을 빠져나왔다.

술에 취해 잘 모르는 사람과 하룻밤을 보내는 것은 지민에게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태연하게 샤워를 하고 나와서 이제 눈을 뜬 남자에게 잘 잤냐는 아침 인사를 건넬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술 먹고 잠자리를 가진 행동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 상대가 문제였지.

버스에 몸을 싣고 자취방으로 돌아오면서도 지민은 울리지 않는 폰을 불안한 눈빛으로 몇 번이고 확인했다. 혹여 눈을 뜬 남자가 어젯밤을 기억해 내고 연락을 해올까 봐서였다. 다행히도 지민이 집에 도착해 씻고 나올 동안에도 연락은 오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분명 남자가 일어나서 돌아갈 시간이었으니 감쪽같이 사라진 하룻밤의 상대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고 지민은 생각했다. 사실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주말 내내 오지 않는 연락에 지민은 마음을 놓고 과제에 집중할 수 있었다. 노트북을 붙잡고 씨름하다 보니 걱정도 희미해져 갔다. 그래, 이 정도까지 연락이 오지 않는데 그쪽도 필름이 끊겼나 보지. 교수의 메일로 과제 제출까지 끝마치고 나자 마음은 더할 것도 없이 가벼웠다.

마음 편하게 잠을 자고 학교로 향한 월요일 아침, 지민은 강의실로 들어오는 사람을 확인하자마자 얼굴이 하얗게 질려 굳어갔다. 모텔방에 두고 도망쳤던, 금요일 밤에 술에 취해 불타오르는 밤을 함께 보냈을 것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멀끔한 차림으로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와 강단 위에 올라섰다. 지민은 입술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그 얼굴을 마주하자 영원히 기억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기억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넓은 어깨에 매달리듯 하여 좋다고 달뜬 신음을 뱉다가 종국에는 좋다고 엉엉 울어버리기까지 하는 자신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지민의 얼굴은 더는 하얗게 될 수 없을 만큼 창백해졌다. 끊겼던 필름 저 너머에서 금요일 밤의 자신이 잔뜩 풀어진 얼굴을 하고선 단단하고 넓은 어깨에 기대 운다.


— 아, 앗! 조교님…! 흣, 너무, 너무 빨라요오….


김진호. 네. 김하준. 네. 나미리. 네. 나혜미. 네! 마동현. 네. 민기석. 네. …출석을 부르는 단정한 목소리와 머릿속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겹치기 시작한다.


— 힘들어? 지민아.

— 흣, 네, 앗! 거기, 거기 좋아요…으응, 아, 조교님! 아, 앗!

— 내 이름 불러 봐, 지민아.

— 석진, 석진이형…!

— 하아…지민아.


“박지민.”

“…….”

“박지민?”

“…….”


야. 옆에 앉아 있던 동기가 지민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지민은 화들짝 놀라며 앞을 바라봤다. 석진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고개를 푹 숙여버리는 지민을 보면서도 석진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박지민 학생?”


— 지민아. 박지민.


“…네, 네?”


— 아으응, 좋아요. 더해줘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지민을 한번 힐긋 바라본 석진은 출석부에 체크를 하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아니 빌어먹게도 왜 하필 지금 생각나는 거야. 지민은 잔뜩 울상이 되어 이제는 프린트를 나눠주고 있는 석진을 바라봤다. 저번주에 담당 교수가 어렴풋이 다음 주부터는 강의 초반엔 조교가 들어와서 출석을 부르고 프린트를 나눠줄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 이제야 생각이 났다. 그리고 그 조교가 그렇게 좋아서 신나게 떡방아를 찧어댔던 사람이라는 것도. 그냥 과 사무실만 가지 않고 잘 피해 다니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대로 책상에 머리를 쾅쾅 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곧 교수가 들어와 강의가 시작되었다. 앞으로 종강 때까지 월요일 아침부터 석진과 얼굴을 마주치는 것과 강의를 드랍하는 것에 대한 저울질이 강의시간 내내 끊이지 않았다. 그래도 2학점이니까 드랍해도 되지 않을까…? 안 돼. 그래도 성적에 빵꾸나는 건데…. 맨날 마주하다간 스트레스로 위에 구멍이 뚫릴지도 몰라…. 그래도 F는 안 되는데…!

강의가 이어지는 시간 내내 고민하던 지민이 내린 결론은 그래, 드랍하자! 였다.

그 후 지민은 과 사무실 근처로는 얼씬도 하지 않았고, 과 사람들이 모여있으면 혹시나 싶어 털을 세운 고양이마냥 잔뜩 긴장한 채로 주변을 살피며 지나갔다. 그런 지민의 노력이 가상해서인지 일주일 동안 석진과 마주칠 일은 없었다.

 

 



그리고 문제의 강의가 시작되기 바로 직전 강의실 주변을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배회하던 지민은 복도 저편에서 걸어오는 석진을 발견하자마자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석진이 그날 밤을 기억하고 말고는 중요치 않았다. 맨정신으론 도무지 석진과 얼굴을 맞댈 자신이 없어서였다. 게다가 튀어 오르는 기억의 조각들을 떠올리다 보면 석진은 필름이 끊길 정도로 술에 취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저러다 석진이 불쑥 그 날 일을 꺼내며 말이라도 걸까 봐 지민은 그냥 성적표에 선명하게 F를 남기는 일을 선택했다.


“야, 박지민. 너 왜 요새 기초토론 들으러 안 와?”

“어, 어?”

“조교님이 너 찾던데. 박지민 학생 안 왔냐고.”

“조교님이 날 찾아…?”

“응. 너 이 주 째 안 나왔잖아.”


석진을 피해 월요일 강의에 출석하지 않은 지 이 주가 지난 어느 날 학식을 먹고 있는 지민을 발견한 동기가 비어있는 옆자리에 앉으며 말을 걸어왔다. 지민은 석진이 자신을 찾는다는 말에 입안이 바싹 타들어 갔다.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지민을 이상한 눈으로 본 동기가 무슨 일이 있는 거냐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왔지만, 지민은 대충 고개만 휘휘 저었다.


“아무 일 없어.”

“그럼 강의는 왜 안 오는데?”

“아…그게…늦잠을 자꾸 자서….”

“학기 초인데 벌써 두 번이나 빠져서 어떡하냐. 다음 주는 꼭 나와라.”

“으, 으응.”


지민은 차마 나 그 강의 드랍이라고 말을 할 수 없었다. 분명 눈앞의 동기는 꼬치꼬치 이유를 캐물을 것이 뻔했고 거기에 저번에 술에 취해서 어떤 잘생긴 남자랑 섹스했는데 아침에 보니 그게 김석진 조교님이더라. 그래서 그 수업에는 들어가지 못하겠다. 그런 말은 죽어도 할 수 없었다. 그날 밤의 섹스는 아주 황홀하고 만족스러워서 조교님의 태평양 같은 어깨에 매달려 좋다고 엉엉 울었다고는 더더욱!

지민은 입에 지퍼를 채운 것처럼 입을 꾹 닫고 이제는 무슨 맛인지 느껴지지 않는 돈가스를 우적우적 씹었다. 그럼 다음 주에 보자. 간다? 엉. 동기에게 대충 손을 흔들어주고는 지민은 고개를 푹 숙였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도대체 술을 얼마나 마셨길래 자기 과 조교 얼굴도 못 알아보고 좋다고 같이 모텔을 가냔 말이야. 이렇게 머리카락을 쥐어뜯어 대다간 머리숱이 남아나질 않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지민은 머리를 뜯는 손을 멈출 수 없었다.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책상에 이마를 쾅쾅 박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고민을 안 한 건 아니었다. 석진이 출석을 부른 다음에 들어가서 늦게 왔다고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매번 지각하는 게 좋아 보일 리가 없었다. 그래도 민망함을 무릅쓰고 어떻게든 잘 넘겨보면 되지 않을까 강의시간 내내 생각을 했지만, 하늘은 지민의 편이 아니었다. 강의가 끝나갈 때쯤 출결 상황에 관해서는 조교를 찾으라고 교수가 못 박는 바람에 지각하면 석진을 피하기는커녕 다이렉트로 마주쳐야 했기에 지민은 울며 겨자 먹기로 F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3주째 강의를 빠지던 날 결국 교수로부터 연락이 왔다. 오후에 연구실로 잠시 오라는 내용이었다.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의 표정으로 하루를 멍하니 보낸 지민은 이제라도 튈까 생각하다 졸업할 때까지 계속 봐야 하는 교수인데 튀었다가는 수습하지 못할 정도로 후폭풍이 거셀 것이 뻔해서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질질 끌며 연구실로 향했다.

연구동의 복도는 고요했다. 그 복도가 꼭 사형장으로 향하는 마지막 길 같이 느껴졌다. 지민은 제발 석진이 안에 없기를 믿지도 않는 온갖 신을 찾아 빌며 노크를 했다. 곧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린다. 다행히도 석진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지민은 잔뜩 긴장한 채로 문고리를 살살 돌려 열었다. 기도가 먹힌 것인지 연구실 안에는 교수 혼자 뿐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그래, 이쪽으로 와요.”


구부정하게 몸을 굽힌 채로 지민은 교수의 책상 옆에 의자를 빼서 앉았다. 교수는 지민을 보며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민도 따라 하하, 어색하게 웃었다.


“목마르지요?”

“괜찮습니다, 교수님.”

“허허. 지금 조교가 없어서 바로 가져다줄 수가 없어 미안해요.”

“아닙니다.”


그 조교가 없어서 저는 정말 다행입니다, 교수님. 지민은 차마 하지 못하는 말을 속으로 삼키며 허허 웃었다. 날씨가 덥지요? 그러게요, 하하…. 그래도 에어컨을 틀면 오한이 들어서 틀 수가 없어요. 그러시군요…. 요새 뭐 학교생활은 어때요? 좋습니다, 교수님. 상투적이고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받기를 잠시 교수는 곧 지민을 부른 본론으로 들어갔다.


“요새 무슨 일 있어요?”

“아, 아뇨. 없습니다.”

“근데 왜 수업을 안 나와요.”

“아…그게….”

“뭐 내 수업이 마음에 안 들어요?”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교수님!”


설명을 바라는 것 같은 교수의 눈빛에 지민은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꽉 물었다 놓았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제대로 된 답은 나오지 않았다. 제가 교수님 조교랑 섹스해서 얼굴 보기가 껄끄럽네요, 라고 답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결국, 지민은 늦잠 때문에 강의를 3주 연속으로 빼먹은 게으른 학생이 되기로 했다.


“늦잠을 자꾸 자서…죄송합니다, 교수님.”

“많이 피곤했나 보네요. 늦잠이라니. 내가 이렇게 따로 불러서 말하는 건 지민군 여태 성적도 좋았고, 내가 아주 예쁘게 보고 있어서 그래요.”

“감사합니다.”

“여태 한 번도 늦잠 때문에 안 오고 이런 적이 없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정말 아무 일도 없어요?”

“네…. 죄송합니다….”


교수는 잠시 말없이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지민을 살펴봤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모습이 정말 늦잠을 자서 강의에 오지 않는 것인지 무슨 일이 있어서 그런 것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지민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1분 1초가 고문 같았다.


“…그래요. 알겠어요.”

“…실망하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뭐 이유가 있으면 강의도 빠져보고 그러는 거죠. 다음 주부턴 올 거죠?”

“아…그게…네….”


힐끔 교수의 눈치를 본 지민이 점점 말꼬리를 흐리며 답했다. 노력해볼게요….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 눕고 싶었다. 이렇게 말해도 자신은 다음 주 강의에 또 가지 못할 것이다. 술이 원수지, 진짜. 다음부턴 그렇게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백 한 번쯤은 되는 것 같은 다짐을 하며 지민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뜬 후 교수를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럼 전 이만….”

“아, 오늘 뭐 저녁 약속 있어요?”

“아니요, 없습니다.”


집에 가려고 몸을 일으키던 지민을 붙잡은 교수의 물음에 답을 한 지민은 0.1 초 후 그 대답을 후회했다. 약속이 있다고 해야지, 박지민 멍청아! 교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반대로 지민은 절망했다.


“잘됐네요. 같이 저녁 한 끼 해요.”

“아….”


뭐라고 거절을 해야 하지. 지민의 눈동자가 바쁘게 굴러다녔다. 그러고 있는 사이 연구실 문이 열렸다. 지민의 등 뒤로 문을 바라본 교수가 반가운 얼굴로 얼른 오라는 듯 손짓을 했다.


“오. 마침 잘 왔네. 오늘 우리 연구실 회식하면서 학생도 같이 가려고.”

“그렇습니까?”


지민은 등 뒤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온몸에 털이 삐죽 곤두섰다. 그렇게 잊고 싶어 하는데 절대 잊히지 않고 있는 목소리였다.


— 내 이름 불러 봐, 지민아.


지민은 눈을 질끈 감은 채로 천천히 뒤를 돌았다. 꾹 감고 있던 눈을 뜨자 지난 시간 동안 그렇게 애타게 피해 다녔던 석진이 서 있었다.


“금방 갈 테니 학생이랑 먼저 식당 가 있어. 예약은 그때 거기로 했나?”

“네, 교수님.”


제발, 교수님. 제발 저를 저 사람이랑 단둘만 보내지 말아 주세요. 지민이 간절한 눈빛으로 휙 몸을 돌려 교수를 바라보았다. 지민의 간절한 SOS는 안타깝게도 교수에게 닿지 못했다.

지민은 울고 싶은 기분으로 가방끈을 손에 꼭 쥔 채로 석진의 뒤를 따랐다. 석진은 별다른 말 없이 지민보다 조금 앞서 걷고 있었다. 이대로 나란히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다간 체한 후 먹은 걸 다 토할 게 뻔했다. 지민은 손을 꼼지락거리다 결심한 듯 조심스럽게 석진을 불렀다.


“저…조교님….”


석진은 답이 없었다. 지민은 혹시 석진이 듣지 못했나 싶어 발걸음을 빨리해 조금 석진에게 가까이 다가간 후 다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는…그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일이 생겨서….”

“박지민 학생.”

“네?”


석진이 제자리에 멈춰서 조금 뒤의 지민을 내려다봤다. 잔뜩 굳어있는 얼굴은 훈남 조교님이라고 동기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 다정하고 젠틀한 모습의 석진이 아니었다.


“섹스는 나랑 했는데 왜 교수님을 피하나?”

“…예?”

“나랑 문제가 있으면 나랑 해결해야지 교수님께 예의는 지켜야지.”

“…….”


지민은 뭐라 답하지 못한 채 입을 뻐금거렸다. 대체 무슨 수로 해결을 하는데요? 턱 끝까지 물음이 차올랐지만, 석진은 제 할 말만 하고 다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지민은 잔뜩 울상이 된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지민의 예상대로 저녁 식사 자리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교수의 말에 지민을 비롯한 조교들이 애써 웃으며 어떻게 분위기를 맞춰갔지만, 지민은 당장에라도 화장실로 뛰어가 먹은 걸 다 게워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교수는 만족스러운 듯 술잔을 한잔 두잔 기울이기 시작했고 주변에 앉은 사람들에게도 권하기 시작했다. 지민은 어색하게 웃으며 교수가 따라주는 술을 받아 비웠고, 빈 잔에는 금세 새 술이 들어찼다. 술을 멀리하자고 다짐한 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지민은 술잔을 앞에 두고 어색하게 눈치를 보다가 이런 분위기에 질식할 바엔 그냥 마시고 죽자는 생각으로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서서히 취기가 오르기 시작한 지민은 생글생글 웃으며 교수에게 듣기 좋은 입에 발린 말들을 늘어놓으며 점수를 땄다. 다른 조교를 향해서도 “아이, 조교님 정도면 잘 생기셨죠!” 같은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하던 지민은 맞은편에 앉은 석진과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고개를 휙 돌려버린다. 석진은 어이가 없는 얼굴로 피식 웃으며 술잔을 비웠다. 저러다가 금방 또 취해서 제 몸도 못 가눌 것 같은데.



식사 자리가 술자리로 넘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수는 먼저 자리를 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마셨는지 눈까지 풀려 샐샐 웃고 있는 지민을 보다 못한 석진이 지민에게로 향한 술잔을 물렸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지민은 꼭 잠든 것처럼 미동도 없었다. 석진은 계속 지민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다른 조교들과 술자리를 이어갔다.

지민은 갑자기 올라오는 취기에 세상이 핑핑 도는 것을 느꼈다. 술이 깨야 한다는 확고한 목적이 생기기 무섭게 지민은 거칠게 의자를 뒤로 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어? 어디가? 지민의 옆에 앉았던 조교가 지민의 팔을 붙잡으며 물었다. 지민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가게 밖을 가리켰다. 술 좀 깨고 올게요.

밖으로 나온 지민은 서늘한 밤공기가 닿자 머리를 지배하고 있던 취기가 가라앉는 것 같았다. 문 옆에 쪼그리고 앉아 심호흡하며 술이 깨길 기다리고 있는데 가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무심코 고개를 돌렸던 지민은 가게 밖으로 나오는 인물을 확인하고 쪼그려 앉은 채로 뒷걸음질 치려다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그 날도 그러더니. 엉덩방아 찧는 건 왜 이렇게 좋아해?”

“아니,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몸을 일으켜 앉고 싶은데 몸이 영 말을 안 들었다. 혼자 낑낑거리다가 일어나는 것을 포기한 듯 바닥에 철푸덕 주저앉은 채로 지민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끙끙거리는 지민을 보며 피식 웃은 석진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아, 모야. 조교님 담배 펴요?”

“피면 안 돼?”

“되게 안 어울린다.”

“담배가 어울리는 사람은 또 뭐야. 내가 어떻길래?”


분명 술을 깨기 위해 나온건데 점점 더 취하는 것 같았다. 지민은 땅이 빙빙 도는 것을 보며 히히 웃다가 고개를 들어 석진을 바라봤다. 석진도 두 명이 되었다가 세 명이 되었다가 빙빙 돌았다. 그 모습을 보며 깔깔 웃던 지민이 별안간 표정을 굳힌 채 석진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조교님…되게 깨끗하고 젠틀하고…그런 이미지죠.”

“내가?”

“분명 그런데…위는 젠틀한데 왜 허리 아래는 안 그래요?”

“뭐?”


석진은 물고 있던 담배를 떨어뜨릴 뻔했다.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는지 지민은 또 뭐가 재밌는지 히히 웃기 시작했다.


“나 그날 진짜 홍콩 갈 뻔했잖아요. 평소에 조교님 그렇게 안 봤는데….”


푸하하 터지는 웃음소리에 지민이 잔뜩 불만인 얼굴로 고개를 휙 쳐들었다. 석진이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허리까지 젖혀가며 웃고 있었다.


“뭐가 웃겨요? 자기 정력 좋다는 게 웃겨요?”


허리를 젖힐 땐 언제고 이제 와선 허리를 푹 숙인 채로 유리 닦는 비슷한 소리를 내며 웃고 있는 석진을 지민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아무튼…허리 위랑 허리 아래가 참 다른 분이시라구요, 조교님….”

“지민아.”


웃는 걸 멈춘 석진이 제법 진지한 목소리로 지민을 불렀다. 지민이 구시렁거리던 것을 멈추고 슬쩍 석진을 올려다본다.


“왜요.”

“그 날 그렇게 좋았어?”

“…아니, 아이씨, 뭐 그런 걸 물어봐요….”

“그래서 나 보면 자꾸 젠틀하지 못한 내 아래가 생각나서 그렇게 도망 다닌 거야?”

“아, 아이, 아니, 무슨 소리예요!”


술기운인지 얼굴로 열이 확 몰렸다. 지민은 툴툴거리며 점점 허리를 숙여 자신과 눈높이를 맞추는 석진을 피해 엉덩이로 뒤를 향해 꿈틀꿈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도망가지 마.”


그런 지민의 팔을 붙잡은 석진이 그날 밤처럼 달콤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안 되는데…. 진짜 안 되는데…. 지민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는 네가 날 못 알아봤는데. 오늘은 알아보지?”

“그 정도로 안 취했어요!”

“그럼 오늘은 어떡할까? 취하지도 않고, 서로 누군지도 다 아는데.”


지민은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석진의 어깨에 기댔다. 안 취했다는 건 거짓말이지만, 적어도 지난밤과는 달리 눈앞의 상대가 누군지는 알아봤다. 필름이 끊겨 정신없이 보냈던 그 밤과는 달랐다. 아씨…. 뒷머리를 마구 헝클던 지민이 석진의 어깨에 묻었던 고개를 들어 석진을 마주 봤다.


“…가요.”

“어딜?”

“아, 뭘 물어요!”

“너 이러고 또 수업 안 나오는 거 아니지?”

“…갈게요, 수업도.”

 

 

 

 

지민은 눈을 번쩍 떴다. 낯선 천장이 보였다. 데자뷰인가. 꿈뻑꿈뻑 천장을 올려다보던 지민이 옆을 봤다. 그때처럼 석진이 곤히 자고 있었다. 얼마나 밤새 소리를 질렀는지 목이 아팠다. 그날 아침처럼 도망갈 이유도 없었기에 씻을 생각으로 침대에서 비척비척 일어나는데 손목이 잡힌다.


“…또 도망가?”

“도망 안 간다니까요.”

“…….”

“아! 씻으러 가요. 도망 안 가요!”

“…그래.”


지민의 손목을 놓아준 석진이 다시 잠이 든다. 지민은 어기적거리는 걸음걸이로 벽이 투명한 욕실로 들어갔다. 꼭 방을 골라도 이런 걸 골라. 툴툴거리며 샤워기 아래에 선다.

씻고 나오니 어느새 일어난 석진이 침대에 앉아 지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온통 투명한 욕실의 벽을 떠올린 지민이 얼굴을 붉히며 베개를 들어 석진에게 던졌다.


“뭘 훔쳐봐요!”

“아니, 훔쳐보다니! 그냥 보이는 걸 본 거야!”


석진은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얼굴이었다. 지민은 피식 웃으며 침대로 뛰어들었다. 항상 단정한 얼굴이나 사람 좋게 웃는 얼굴만 봤는데 어제오늘 다양한 표정의 석진을 만난 것 같아 신기했다.


“조교님 생각보다 표정 되게 다양하시네요.”

“내가 표정이 풍부하긴 하지.”

“그리고 자뻑도 좀 심하신 거 같아요. 그거 아래 그렇게 내놓고 있는 것도 자신감이에요?”

“야, 이렇게 크고 아름다운 건 감출 게 아니지!”


지민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이불 속으로 꼬물꼬물 파고들었다. 젖은 머리가 하얀 베개에 닿아 흐트러졌다. 석진은 그 모습을 내려보다 허리를 숙여 지민의 이마 위로 짧게 입을 맞췄다. 지민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석진을 바라봤다.


“지민아. 애인 있니?”

“있으면 이러고 다니겠어요?”

“너 하루 사이에 내가 많이 편해졌나 보다?”

“아니…뭐…이런 사이에 불편할 건 또 뭐 있다고….”

“이런 사이가 뭔데?”


지민은 석진의 물음에 말문이 턱 막혔다. 그러게. 이런 사이가 뭘까. 조교와 학생? 섹스 파트너? 고민하는 지민의 얼굴을 보던 석진이 지민이 덮고 있는 이불을 확 젖혀냈다. 지민의 놀란 눈이 석진에게로 향했다.


“너 입학했을 때부터 엄청 귀엽다고 내가 침 발라놓았었는데 알아?”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래서 지난번에 너 만나서 처음으로 섹스했던 밤. 이제 때가 되었다 싶었는데 너 홀랑 도망갔더라?”

“아, 아니 그건 도망이 아니고…. 아씨….”

“이제 도망 안 가기로 했지?”


석진이 지민의 어깨를 잡고 바로 눕힌 후 바로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지민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석진의 집요한 시선을 피해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지민아.”

“…네?”

“좋아해.”

“…….”

“진짜야.”

“저…조교님…?”

“이제 조교님 말고 자기야 소리가 듣고 싶은데.”


이 사람이 미쳤나 정말. 지민은 손발이 오그라드는 기분에 석진을 밀쳐냈다. 밀려난 석진은 억울한 표정이었다.


“왜! 분위기 좋았는데?”

“아니, 자기야가 뭡니까, 자기야가!”

“그게 뭐! 그게 어때서!”

“호칭은 그냥 형으로! 그 이상은 양보 못 해요!”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럼 우리 연애하는 거예요.”

“그래! …뭐?”

“먼저 좋다고 할 땐 언제고…연애하는 거라고요!”


실실 웃는 얼굴로 지민에게 다가오던 석진이 잔뜩 기대한 얼굴로 입술을 모으고 있는 지민의 코앞에서 브레이크를 걸더니 벌떡 일어났다. 지민이 의아한 얼굴로 실눈을 뜨자 석진의 다리 사이가 눈높이에 떡하니 있었다. 악, 진짜! 눈 뜨자마자 보이는 덜렁거림에 지민이 꽥 소리를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형 씻고 나올게. 기다리고 있어. 심심하면 구경해도 돼.”


석진이 눈을 찡긋하며 유리 벽을 가리켰다.


“아, 됐고 그것 좀 치워요!”


지민의 외침은 들리지 않는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석진이 욕실로 향했다. 사귀기로 한 거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거 아닐까. 넓은 침대에 홀로 누워 욕실에서 들리는 물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지민은 고민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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