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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체리콕 上


  보스가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다는 것은 조직원 중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쉬쉬하면서도 저들끼리 모이면 보스와 그 정부에 대해 떠들기 바쁜 조직원들을 보며 정국은 눈살을 찌푸렸다. 할 일이 그렇게 없어 쓸데없는 말들을 하냐고 큰 눈에 힘을 주고 쏘아보자 모여있던 덩치들이 입을 다물고 차려자세로 서서 정국의 눈치를 살폈다. 아직 앳된 얼굴은 밖에 나가면 대학생 소리를 들을 정도였지만, 정국은 이 바닥에서 구른 짬밥으로는 여기 있는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았다.


  철이 들기 시작할 시기부터 거리를 전전하며 살았다. 아직 어린 아이는 차가운 거리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평생 뒷골목 양아치들처럼 잡일이나 하고 살았을지도 모를 정국을 거둔 것이 지금 몸담은 조직의 보스였다. 자신에게 손을 내밀던 보스의 모습은 머리 한 편에 각인 되어 정국이 조직에 바치는 충성의 원동력이 되었다.


  주변에선 정국을 두고 타고났다고 했다. 탄탄한 몸이나 뛰어난 운동 신경, 근력까지 갖춘 채로 자라난 정국이 가장 타고난 것은 뛰어난 감각과 센스였다. 어릴 때부터 살아남기 위해 눈치를 보고 자라난 성장 배경은 좋은 밑거름이 되었다. 곱고 어린 외모에 시비를 걸어오는 조직원들을 하나둘 때려눕히기 시작한 이후로 조직 내에서 정국의 위치는 높아져만 갔다. 우직하면서도 빠르고 정확한 일 처리와 타고난 싸움의 기술은 신뢰를 얻기 충분했고,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정국은 중간 관리직까지 오르게 됐다.


  그중에서도 보스에게 보이는 충성도가 높은 만큼 정국은 보스의 젊은 정부에 대한 말들이 오르내리는 지금 상황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국의 밑에 있는 조직원들은 저들끼리 소문에 대해 떠들다가도 정국이 나타나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입을 다물었다. 소문 속의 젊은 정부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보스의 옆에 붙어 갖은 아양을 떨고! 그걸로도 모자라 보스를 자꾸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하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아 정국은 얼굴도 모르는 젊은 정부에 대한 반발심이 가득했다.


  단순히 조직원들 입에 오르내리다 끝날 줄 알았던 보스의 젊은 정부에 관한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보스가 그 정부에게 조직에서 운영 중인 사무실 하나를 내줬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잘 펴진 정국의 미간이 일그러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만난 적도 없는 사람에 대한 적대감만 착실히 키워가던 어느 날, 근래 저기압인 정국의 눈치를 살살 살피며 부하 한 명이 조심스럽게 정국을 불렀다. 잔뜩 예민해 보이는 얼굴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침을 꿀꺽 삼킨 부하는 더듬더듬 말을 전했다.


  “보, 보스가, 부르, 부르십니다.”

  “보스가?”


  보스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예민함이 가득하던 얼굴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긴장했던 부하는 텁텁해진 입안으로 애써 침을 삼키며 어서 가보라고 정국을 재촉했다. 정국은 보스가 왜 자신을 찾는지 감이 오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난번 자신에게 맡겼던 일도 무사히 잘 처리가 되었고, 현재 관리 중인 구역도 별문제가 없었다. 새로운 일을 맡기시려는 걸까. 의문을 품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화가 난 것 같진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사무실 안의 부하들은 겉옷을 챙겨 사무실을 나서는 정국에게 인사를 했다.


  “다녀오십시오!”


  덩치만큼이나 우렁찬 인사에 정국은 대충 손을 휘저어 답을 해준 후 보스가 기다리고 있을 곳으로 서둘렀다.




  보스의 방으로 들어가기 전 단정하게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큼큼. 목까지 한 번 가다듬은 후, 조심스럽게 고급스러운 문에 노크하자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그래. 정국이 왔나?”

  “안녕하십니까.”


  깍듯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바로 서자 보스가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했다. 정국은 두 손을 앞으로 공손히 모은 채 보스의 앞에 섰다. 앉지. 보스가 앉을 것을 권하자 정국은 조심스레 푹신한 소파 위로 엉덩이를 붙였다. 보스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슨 좋은 일 있으십니까?”


  보스의 얼굴을 살피던 정국이 묻자 미묘하게 웃고 있던 보스가 터놓고 허허 웃었다. 긴장에 굳어 있던 정국의 입꼬리도 따라 슬쩍 올라갔다.


  “요새 생활은 어때?”

  “다 좋습니다. 보스 덕분입니다.”

  “허허, 그것참 다행이구나.”


  정국이 멋쩍게 웃으며 뒷목을 만지작거렸다. 그런 정국의 얼굴을 꼼꼼히 살피던 보스가 정국의 앞으로 서류봉투 하나를 밀었다. 정국은 뒷목을 매만지던 손을 멈추고 조심스레 서류봉투를 집어 들었다. 의문이 담긴 시선으로 보스를 바라보자 열어보라는 듯 고개를 까닥한다. 정국은 잘 봉해진 서류봉투를 뜯었다. 안에는 서류 몇 장이 들어있었다.


  “정국이 너도 들었을 거라 생각된다만….”


  정국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서류는 보스가 젊은 정부에게 내주었다는 사무실에 관한 내용이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정국은 부디 제가 생각하는 그게 아니길 빌며 마지막 남은 희망 한 가닥을 손에 꽉 쥔 채로 보스를 바라봤다. 그런 정국의 시선을 읽었는지 보스는 정국의 시선을 피했다.


  “얼마 전에 아끼던 아이에게 사무실을 하나 맡겼는데…아무래도 도움이 있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 말이다. 정국이 네가 경험도 있고, 사무실 운영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테니 맡겨볼까 하는데, 어떠니?”

  “…….”


  정국은 뭐라 답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작게 벌린 채로 보스를 바라봤다. 이리저리 떨리는 정국의 시선과 마주한 보스가 처음 정국에게 손을 내민 날처럼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국은 마른 입술을 축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자신에게 거부권은 처음부터 없었다.


  “고맙다. 그냥 옆에서 일만 봐주고 도와주면 될 거야.”

  “예.”

  “경호 일도 같이 맡기는 거니까 무슨 일 생기지 않게 하고. 잘할 거로 생각한다.”


  자리에서 일어난 보스가 정국의 어깨를 가볍게 두어 번 두드렸다. 하하. 어색하게 웃은 정국이 자리에서 일어나 서류봉투를 꽉 쥔 채로 보스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바로 거기로 가면 될 거야. 사무실에 방도 다 딸려 있으니 거기서 지내면 될 거고.”

  “…예?”

  “사무실에 딸려 있다고 허름하고 그런 건 아니고, 고급 오피스텔과 다를 것 없다고 자부하니 잠자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거야.”

  “…지금 사무실은…?”

  “거기는 안정도 되었고, 변수도 딱히 없으니 다른 녀석을 보내 일을 배우게 할 생각이다.”


  정국의 손에 쥐어진 서류봉투가 구겨졌다. 정국은 차오르는 욕지거리를 애써 누르며 하, 하하…어색하게 웃었다. 단순하게 옆에 붙어 뒤치다꺼리하라는 수준이 아니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더니, 딱 이런 상황을 위해 존재하는 말이 틀림없었다.


  “짐은 천천히 옮겨오면 될 거고…. 그럼 잘 부탁한다.”


  보스는 굳어 있는 정국의 어깨를 넉살 좋은 얼굴로 토닥였다. 정국은 애써 웃는 얼굴로 고개를 숙인 후 빠르게 방을 빠져나왔다. 보스의 방과 어느 정도 떨어지자 쥐고 있던 서류봉투를 찢어질 듯 꾸긴 후, 벽을 향해 패대기쳤다. 후. 입바람에 정국의 앞머리가 펄럭였다. 단정하게 매여있던 넥타이도 거칠게 풀어냈다. 머리를 쓸어넘기며 한숨을 푹 쉬던 정국이 집어 던졌던 서류를 다시 집어 들었다. 소문의 주인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국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사무실에 도착한 정국은 차를 세운 후, 운전대를 잡은 채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무리 보스를 위한다지만 이건…. 운전대에 제법 세게 한 번 머리를 쾅 박은 정국은 아프지도 않은지 잔뜩 흐트러져있는 넥타이를 잡아 바로 맸다. 헝클어진 머리를 대강 정리한 후, 백미러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한 번 확인하고는 차에서 내렸다.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무실은 외관부터 깔끔했다. 건물 자체가 보스의 소유라고 했다. 깔끔한 외관을 바라보는 정국의 표정이 썩 좋지 못했다.


  광택이 나는 로비의 바닥을 가로지른 정국은 1층에 도착해 있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건조한 여자의 목소리가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후, 전정국, 참자, 이건 일이다. 보스가 직접 맡기신 일이다. 자신을 세뇌하듯 중얼거린 정국이 크게 심호흡을 한 후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새 건물 아니랄까 봐 반질거리는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어울리지 않게 정장을 차려입은 덩치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정국은 굳은 얼굴로 덩치들 사이를 지나 사무실 문 앞에 섰다. 오늘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쉰 후 노크했지만 아무 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정국은 다시 한 번 문을 쾅쾅 두드렸다.


  “…들어갑니다.”


  답이 없는 내부에 짜증이 난 정국은 들어간다는 통보 후에 문을 열어젖혔다. 사무실 내부는 아주 깔끔했다. 자신의 사무실과 크게 다를 것 없는 구조였는데,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사무실 안에 또 다른 방이 딸려 있다는 점이었다. 내부에 딸린 문이 열려 있어 방 안에 놓인 큼지막한 사이즈의 침대가 보였는데 누군가 그 위에 누워 있었다. 아마도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인 듯싶었다. 조용한 사무실 내부에 정국의 구두 소리만 울렸다. 방문 앞에 선 정국이 들어가려다 멈칫하고 열린 문을 두드렸다.


  “으응?”


  밖의 문을 두드릴 때는 답이 없던 사무실의 주인이 부스스 침대에서 일어나 고개를 들고 정국을 바라봤다. 소문대로 젊은 남자였다.


  “전 오늘부터….”

  “왔구나!”


  남자가 벌떡 침대에서 일어났다. 얇은 가운을 걸치고 있었는데 조심성 없는 남자의 움직임 때문에 앞섬이 벌어져 뽀얀 살이 보였다. 정국은 얼굴을 찌푸렸다.


  “안녕. 나는 박지민이고 너는….”

  “전정국이라고….”

  “토끼!”

  “예?”

  “오늘부터 넌 토끼야.”


  정국은 어이가 없다는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감정에 휩싸여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한 채 눈만 깜빡였다. 애초에 정국은 썩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기도 했다.


  “사진으로 볼 때보다 잘생겼네.”


  지민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딱 벌어진 어깨나 탄탄한 가슴이나 자기주장 강한 허벅지까지…. 거기다 토끼를 닮은 예쁘고 잘생긴 얼굴은 정말 자신의 취향에 딱 맞았다. 웃음이 만개한 얼굴로 정국의 앞에 선 지민이 어안이 벙벙한 정국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앞으로 잘 부탁해.”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린 정국이 놀라서 펄쩍 뛰며 지민을 밀어냈다. 지민은 그래도 뭐가 좋은지 연신 웃는 얼굴이었다. 정국은 입안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무언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된 것 같았다.


  “엉덩이도 엄청 탄탄하네!”


  개의치 않고 다가와 이제 아예 정국의 엉덩이를 쪼물딱 거리는 작은 손에 정국은 파르르 떨었다. 아, 하지 마세요! 하면서 밀어내도 지민은 그 순간에만 알았어, 알았어, 할 뿐이었다. 정국은 벌써 앞날이 걱정되었다.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순정 때문에.


 


  첫날은 별일 없이 지나갔다. 사무실을 맡은 이후로 제대로 해놓은 일이 아무것도 없을 거란 정국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는 서류를 보며 정국은 의외라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 지민을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왜 그렇게 봐?”


  지민이 새초롬한 눈으로 물었지만 정국은 오, 감탄사를 내뱉으며 다시 봤다는 듯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지민은 눈앞의 토끼 같은 정국의 얼굴을 보며 콧노래를 불렀다. 작은 손길에도 화들짝 놀라던 모습까지도 귀여운 게 마음에 쏙 들었다. 꼼꼼하게 일지와 서류를 검토하는 모습도 마음에 들었다.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 하나는 끝내주지. 흐흥. 지민은 아예 턱까지 괸 채로 정국을 빤히 쳐다봤다.


  “왜 그렇게 보세요.”


  조금 전 지민이 했던 물음을 이번엔 정국이 하고 있었다. 지민은 흐흐흐 웃으며 잘생겨서, 라고 답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던 말이었지만, 이런 말에는 영 면역력이 없었다. 정국의 귀 끝이 빨갛게 물들었다. 지민은 빨갛게 물든 귀 끝을 보며 킥킥 웃었다. 귀여워.


 


  “밥 아직 안 먹었지? 뭐 좋아해?”


  서류에 고개를 처박고 더는 상대를 해주지 않는 정국에 혼자 사뿐거리는 몸짓으로 사무실을 돌아다니던 지민이 별안간 정국을 돌아보며 물었다. 하얀 서류에 고정되어 있던 정국의 시선이 지민에게 닿았다. 딱히 배가 고프지는 않은 감각에 정국은 큰 눈만 깜빡였다. 지민은 정국의 대답을 기다리며 자신에게 향해있는 정국의 얼굴을 꼼꼼하게 뜯어봤다. 이렇게 봐도 잘생겼고, 저렇게 봐도 잘생겼다. 만족스러운 웃음이 또 얼굴 가득 퍼져나갔다.


  “저는 다 잘 먹는데…, 그쪽…은요?”


  먹성도 좋은 모양이었다. 지민은 정국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지만, 방금 정국이 자신을 부르는 호칭만큼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쪽이 뭐야, 정 없게.”

  “그럼 뭐라고 불러요?”

  “알려줬잖아, 내 이름.”


  정국의 반듯한 미간이 조금 구겨졌다. 이름을 막 부르기에 그는 자신의 보스 총애를 받는 정부였고, 그렇다고 존칭을 붙여 불기엔 차마 님이라는 글자가 목구멍에 턱 걸려 나오질 않았다. 호칭을 고민하는 정국의 미세하게 찌푸려진 얼굴을 보며 지민은 태평하게 찡그린 얼굴이 섹시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음…그럼, 지민…형?”


  예상외의 호칭에 지민의 눈이 동그래졌다. 정국은 눈이 동그랗게 변한 지민의 표정을 살폈다. 형이라니, 역시 너무 나갔나. 아씨, 그럼 대체 뭐라고 불러. 자신과 그렇게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 상사의 젊은 남자 애인을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같은 거 생각해본 적도 없었고, 굳이 생각하고 싶지 않은 주제이기도 했다.


  지민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속으로 욕을 짓고 있었다. 대부분은 시발, 존나 귀여워, 정국이! 같은 말이었다. 형이라니, 형이라니! 깜찍한 호칭에 거친 언어로 들뜬 마음을 표출하고 싶었지만, 토끼 같은 정국이 놀랄까 봐 지민은 입을 꾹 다물고 그냥 눈만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그런 지민의 속을 알 길이 없는 정국은 그 표정이 화가 난 얼굴이라 생각했는지 정국은 입을 꾹 다물고 다른 호칭을 생각하느라 작은 머리를 바쁘게 굴리고 있었다.


  “대박.”

  “예?”

  “완전 좋아. 또 불러 봐. 지민형아~하고.”

  “형아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


  지민이 언제 굳어 있었냐는 듯 얼굴 가득 웃음을 띠는 걸 보며 괜한 고민을 했다는 사실에 표정을 굳힌 정국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흐흐흥. 지민은 멈췄던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사무실 문을 벌컥 열었다.


  “요 근방에 맛있는 거 전부 사와.”


  사무실 밖을 지키고 서 있던 덩치 한 명에게 태연자약하게 점심 메뉴를 주문하고 돌아선 지민이 문을 쾅 닫고 정국이 앉아 있는 책상 앞으로 팔랑거리며 뛰어왔다. 정국은 다시 서류에 코를 박고 있었다. 지민은 그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책상 위로 꽃받침을 하고 정국을 뚫어지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따끔거릴 정도로 시선이 느껴질 텐데도 정국은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았다.


  “나 그래도 일 열심히 해놨는데, 어때?”

  “뭐, 나쁘지는 않네요.”


  지민이 킥킥 웃었다. 딴에는 표정을 굳힌다고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꽤 놀란 것이 정국의 표정에 드러나서였다. 솔직하지 못한 점까지도 귀엽다니까, 우리 토끼. 이제 만난 지 한 시간이 되었는데 우리 토끼가 됐다는 점이 정국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입씨름할 힘도 없었으며 한다고 해서 이길 것 같지도 않았기에 입을 일자로 다무는 길을 선택했다.


  “보스가 너 엄청 마음에 들어 하는데. 알고 있었어?”

  “예?”


  보스라는 말이 나오기 무섭게 정국이 서류에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두 눈에 생기가 돌다 못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렇게 보스가 좋아?”


  지민이 눈을 새초롬하게 뜬 채 물었다.


  “훌륭한 분이시니까요.”


  지민의 얼굴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너무 들떴나. 정국은 다시 입을 일자로 닫은 채 표정을 굳히며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훌륭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어.”


  정국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찌푸려진 얼굴이 뭐라 반박을 하려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지민은 정국을 똑바로 바라보며 문을 등 진 채로 건조한 목소리로 노크에 답했다. 계속 웃는 얼굴만 보여서 몰랐는데 표정 없이 굳은 지민의 표정은 냉기가 뚝뚝 떨어졌다. 묘한 신경전을 깨뜨린 것은 지민의 지시대로 양손 가득 먹을 것을 든 채로 사무실 문을 연 부하 A에 의해서였다.


  “형님, 시키신 대로 많이 사 왔습니다!”


  조용한 사무실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할 정도로 우렁찬 소리였다. 정국을 바라보고 있던 지민이 뒤를 돌아 사무실 안의 가라앉은 공기에 영문을 모른 채 눈치를 살피던 A에게 손짓했다. 사 온 음식을 탁자 위에 두고 나가라는 뜻이었다. 식욕을 자극할 만한 냄새가 풀풀 나는 음식들을 올려둔 후 지민과 정국에게 꾸벅 인사를 해 보인 A는 빠르게 문을 닫고 사라졌다. 탁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자 사무실 안은 다시 정적이었다.


  “와서 먹어.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다 사오라고 했는데.”


  여전히 표정이 없는 지민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정국이 서류를 내려놓고 탁자로 다가가 지민이 앉아 있는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다 샀다는 말이 빈말은 아닌지 종류별로 음식들이 탁자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거 다 먹을 수 있는 거예요?”


  정국이 젓가락을 뜯으며 물었다. 아무리 봐도 둘이 먹기에는 양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소파 위로 발을 올린 채 앉아 무릎을 세우고 팔로 감싼 채로 지민이 정국을 바라봤다.


  “너 많이 먹으라구.”

  “그래도 이건 너무 많잖아요.”


  지민이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지민의 냉한 기운이 가시자 정국은 조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지민은 어느새 다시 흐뭇한 미소를 온 얼굴에 띄운 채로 정국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민의 얼굴을 힐끔거리며 보던 정국이 치킨을 한 조각 집어 들었다. 한 입 베어 물고 보니 지민은 여전히 무릎 위로 고개를 올린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안 드세요?”

  “너 먹는 것만 봐도 배불러.”


  대체 언제 봤다고 저 사람은 이렇게 닭살 돋는 멘트를 날리는 걸까. 정국은 먹던 닭 다리를 뱉을 뻔했다. 빈말은 아닌지 정말 잘 먹는 손주 지켜보는 것 같은 미소가 지민의 얼굴에 걸려 있었다. 정국은 다 먹은 닭 다리뼈를 휴지 위에 내려놓으며 탕수육 비닐을 벗겼다.


  “…부먹이세요, 찍먹이세요?”

  “응? 난 찍먹!”


  소스를 부으려던 손을 멈칫한 정국이 그릇을 내려놓고 젓가락을 찾아 뜯은 후 지민에게 건넸다.


  “아무리 그래도 혼자 먹긴 좀 그러니까 드세요. 사주시는 건데.”


  지민은 정국이 내민 젓가락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정말 배가 별로 고프지 않았지만, 자기 스타일의 귀여운 연하남이 젓가락을 내미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지민이 젓가락을 받아들자 정국은 피자 박스를 열었다. 무려 치즈 바이트였다.


  정국이 피자 한 조각을 입으로 가져가는 것을 지켜보던 지민도 다리를 소파 아래로 내리고 몸을 당겨 앉았다. 배가 고프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탕수육 하나를 입에 넣자 식욕이 돌았다. 이제는 왕만두를 우물거리는 정국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피자 한 조각을 해치운 지민이 부른 배를 통통 두드렸다.


  “벌써 다 드셨어요?”


  남은 만두 반을 한입에 꿀떡 삼킨 정국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젓가락을 내려놓는 지민을 바라봤다.


  “응. 나 원래 많이 안 먹어.”


  맛있는데. 피자를 한 조각 더 집으며 정국은 똥그란 눈을 굴렸다. 배가 부르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닌지 지민은 몸을 쭉 편 채로 배를 쓸어 내리고 있었다.



  정국이 적게 먹는 편은 아니라지만 남은 음식을 다 먹기에는 정말 무리였기에 반 이상은 그대로 다시 A의 손에 들려 나가야 했다.


  “다음부터는 이렇게 많이 안 사주셔도 돼요.”


  배가 차서 그런지 정국은 뻣뻣하게 굳어 있던 태도가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지민은 여전히 소파에 앉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쭉쭉 늘리던 정국은 기지개를 켜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다시 책상 앞으로 향했다.


  다시 착실하게 서류로 시선을 고정한 정국을 여전히 소파에 앉은 채로 지민이 흐뭇하게 웃었다. 구김 하나 없이 단정한 하얀 셔츠와 반듯한 이마가 잘 드러나는 깐 머리, 잘 뻗은 콧날과 별을 박은 것처럼 반짝거리는 커다란 눈, 집중하면서 살짝 벌어진 입 사이로 보이는 토끼 같은 앞니까지. 마음에 들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정국의 앞에서 조잘거리던 지민이 조용히 소파에 앉아 움직이지 않자, 사무실 안은 정국이 간간이 종이를 넘기는 소리만 들렸다. 정국을 지켜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시간 가는 줄 몰랐기에 밖이 어둑해지기 시작했음을 지민이 눈치챘을 때는 밥을 먹은 이후로도 꽤 시간이 지나있었다.


  “해 진다.”

  “불 켤까요?”


  몇 시간의 공백을 깬 지민의 목소리에 정국이 고개를 들었다. 지민은 조용히 고개를 저은 후, 소파에 푹 묻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이만하고 집에 가자.”

  “벌써요?”

  “응. 너 사실 아까 일 다 한 거 알아.”

  “…….”

  “뭘 그런 표정으로 봐? 계속 너만 보고 있었는데 그 정도야 당연히 눈치채지.”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지민을 보던 정국은 고개를 갸웃하며 책상 위를 깔끔하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별로 어지르지도 않았기 때문에 퇴근을 위해 주변을 정돈하는 데는 몇 분 걸리지 않았다. 책상을 정리한 정국이 정장 자켓을 팔에 걸친 채 지민이 앉아 있는 소파 앞으로 다가왔다. 정국이 퇴근 준비를 마치는 동안 지민은 소파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였다. 안 가요? 그렇게 묻는 듯한 얼굴로 정국이 지민을 내려다봤다.


  “일으켜줘.”


  들려오는 대답이 가관이었다. 허. 정국은 어이가 없단 표정으로 지민을 바라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민은 꿋꿋하게 정국을 향해 팔을 뻗었다. 자신이 잡아 주기 전에는 정말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여서 정국은 쭉 뻗은 지민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워주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지민은 옷을 툭툭 털어 구겨짐을 편 후, 먼저 사무실을 나섰다.


  정국은 혼자 남은 사무실을 한 번 둘러보고 불을 끄고 지민의 뒤를 따랐다. 문 앞에서 정국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지민은 정국이 나오자마자 탄력 있는 정국의 엉덩이로 손을 뻗어 토닥토닥 두드렸다.


  “수고했어.”


  정국은 기습적으로 자신의 엉덩이를 노리는 손을 막지 못하고 또다시 엉덩이를 내어줘야 했다. 즐거운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폴짝폴짝 뛰어가는 지민의 뒷모습을 보며 정국은 수치심에 붉어진 얼굴로 씩씩거리다가 지민의 뒤를 따랐다. 정국이 타고 올라왔던 엘리베이터가 있던 곳과는 반대 방향이었다.


  보스는 이곳에서 생활하라고 했는데 당장 오늘부터 그래야 하는 건지 정국은 고민했다. 간단하게 짐이라도 챙겨오고 싶었기에 오늘은 집에 갔다가 내일 출근하면서 짐을 챙겨와야겠다고 스스로 결론을 내린 후,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 지민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내일 뵙겠습니다.”


  지민에게 답이 없어서 숙였던 허리를 편 정국은 여전히 엘리베이터 안에서 열림 버튼을 누르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지민의 시선에 눈만 데구루루 굴렸다.


  “안 타?”

  “오늘은 집에 가서 짐 챙기고….”

  “짐? 무슨 짐? 위에 다 있어. 그냥 타.”

  “예?”

  “나 팔 아프다. 빨리 타자, 우리 토끼.”


  정국이 타기 전까진 엘리베이터 문을 닫을 생각이 지민에게는 없어 보였다. 정국은 고개를 숙여 지민에게 들키지 않게 작게 한숨을 쉰 후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제야 지민은 만족한 표정으로 가장 꼭대기 층을 눌렀다.


  “살면서 필요한 건 거의 위에 다 있어. 더 필요한 거 있으면 사줄 테니까 언제든 말해.”

  “그래도 제 짐을 챙겨오는 게….”

  “그럼 내일 잠깐 갔다 와. 나 혼자 자는 거 싫으니까.”


  자신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정국은 대답하는 것을 포기했다. 지금 여기서 뭐라고 말하던 눈앞의 남자는 오늘 밤 정국이 오피스텔을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 눈에 선했다. 빠른 속도로 오르던 엘리베이터는 건조한 여성의 목소리와 함께 멈춰 섰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보이는 것은 입이 떡 벌어질 만큼 호화로운 집이었다. 지민은 익숙한 듯 실내용 슬리퍼로 갈아 신은 후, 집 안으로 들어갔다. 여느 호텔 펜트하우스가 부럽지 않은 집은 지내기 나쁘지 않을 거라는 수준이 아니었다.


  정국은 처음 보는 호화로운 집의 모습에 엘리베이터 문 앞에 멈춰선 채로 입을 작게 벌리고 감탄했다. 집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눈동자는 코너에서 불쑥 나타난 지민의 얼굴에서 멈춰 섰다.


  “뭐해? 안 들어오고.”


  쏙 튀어나왔던 얼굴이 다시 벽 너머로 들어갔다. 정국은 신발을 벗어두고 손으로 코끝을 비비며 지민이 사라진 쪽으로 향했다. 아늑한 인테리어였던 입구 쪽에 비하면 깔끔하고 차분한 분위기가 눈에 들어왔다.


  “방은 저쪽. 욕실은 그 옆에. 밥 먹을래?”


  정국은 지민의 손이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지민을 바라봤다. 밥이요? 응. 근데 나 요리 못해. 당연한 말을 하는 듯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말하는 지민의 모습에 정국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만드는 건데 설마 못 먹기야 하겠어.


  “그럼 저 씻고 나와도 돼요?”

  “응. 안에 수건이랑 다 있어. 옷은 가져다줄게.”

  “감사합니다.”


  정국은 지민이 조금 전에 알려준 욕실로 향했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열자마자 멈칫했다. 넓은 집에 걸맞게 욕실도 호화롭기 짝이 없었다. 수납장이 있는 공간은 소지품을 둘 수 있는 받침대와 스킨과 로션을 비롯한 기초화장품들이 놓인 협탁까지 있었다. 그 뒤편은 투명한 벽으로 막혀있었는데 아마도 씻는 공간인 듯싶었다.


  진짜 돈이 썩어나나.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건물 자체가 보스 소유라는 것이 떠오르자 금세 생각이 바뀐다. 돈이 있으면 써야지. 시계를 풀어놓고 답답할 정도로 제일 위쪽까지 꽉꽉 잠갔던 셔츠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벗은 옷을 한구석에 놓아두고 바지를 벗으려는데 욕실 문이 벌컥 열렸다. 화들짝 놀란 정국이 토끼눈을 뜨고 바지를 벗으려던 자세 그대로 열린 문 쪽을 바라봤다.


  “여기 옷. 놀랐어?”

  “아니, 인간에겐 노크라는 좋은 문화가 있지 않습니까?”

  “아. 깜빡했어, 미안.”


  뭐라 더 따지고 싶었지만,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 정국이 입만 뻥긋거렸다.


  “흐흥…. 나는 다시 요리하러 갈게.”


  지민이 문을 탁 닫고 나서야 정국은 조금 전 자신의 벗은 몸을 훑어내리던 지민의 시선이 떠올라 얼굴을 붉힌 채 씩씩거렸다. 진짜 사람이 말이야, 노크도 할 줄 모르고 말이야. 투덜거리며 옷을 마저 벗어두고 반투명한 문을 열고 들어가자 예상대로 커다란 욕조가 놓여있었다. 욕조에 물을 받는 대신 샤워기 앞에 선 정국은 샤워하는 동안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커다란 타월을 하나 꺼내 몸의 물기를 닦아내고 지민이 두고 간 옷으로 갈아입은 후, 상쾌한 기분으로 욕실 문을 연 정국을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탄내였다. 차라리 지민이 욕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반겨주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정국은 아마도 지민이 챙겨주고 갔을 게 분명한 실내용 슬리퍼에 허겁지겁 발을 꿰어 넣고 탄내가 나는 방향으로 다급하게 향했다. 설마 불나고 그런 건 아니겠지. 입안이 바짝 마르는 긴장감은 냄새의 근원을 찾자마자 어이없을 정도로 사르륵 사라졌다.


  “뭐해요, 대체?”

  “어? 다 씻었어? 그러게 이게 왜 이러지…?”


  요리를 못한다는 말을 흘러 듣는 게 아니었는데. 처참한 모습으로 변한 부엌을 보며 정국은 이마를 짚었다. 지민은 요리를 잘하지 못한다는 게 아니라 정말 못하는 거였다.


  “어디 다치진 않았어요?”


  정국이 새까맣게 탄 프라이팬을 내려다보고 있는 지민의 팔을 붙잡으며 물었다. 지민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정국을 한 번 보고는 다시 까맣게 변한 프라이팬으로 시선을 돌렸다.


  “응. 괜찮아.”

  “요리한다더니 뭐 불 쇼라도 했어요? 프라이팬 상태가 왜 이래요.”

  “얘만 그런 거 아니야.”


  예? 정국이 자기가 지금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되묻자 묘하게 자신감에 찬 얼굴로 지민이 살짝 몸을 틀었다. 타버린 냄비가 보였다. 오, 신이시여. 믿지도 않는 신을 찾으며 정국은 고개를 푹 숙였다.


  “대체, 뭘 어떻게 하면 저게 다 타요?”


  지민은 말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꼭 내가 요리를 하겠다는데 이 미천한 프라이팬과 냄비가 타버렸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평소엔 밥 어떻게 먹었어요?”

  “사 먹었지.”


  납득이 되는 대답에 정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 밥을 해먹는데 프라이팬이며 냄비를 태울 리는 없겠지. 휴. 한숨을 한 번 쉬고는 지민의 손목을 잡아 식탁 앞으로 데려온 정국이 의자를 빼준 후 그 위에 지민을 앉혔다.


  “그냥 내가 해줄게요.”

  “와, 너 요리도 할 줄 알아?”

  “잘하는 건 아니고 그냥 먹고살 만합니다.”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워?”

  “아뇨. 형 불 앞에 두는 거 제 심장이 쫄려서 안 되겠어요. 집까지 태워 먹을 거 같아요.”

  “야,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니다.”

  “그냥 여기 있어요.”


  지민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하자 정국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처참하게 변한 부엌으로 향했다. 아직 탄내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 이걸 이제 어떡하지. 프라이팬이랑 냄비는 버려야겠다. 분주하게 부엌을 정리하는 뒷모습을 지민은 흐뭇한 얼굴로 바라봤다. 정국이라고 살림을 썩 잘하는 것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콩깍지가 쓰여도 단단히 쓰인 지민의 눈에는 다 마음에 들었다.


  대강 부엌이 정리되자 정국은 냉장고 문을 열었다. 계란을 꺼내고 밥을 안 해먹는 데 왜 있는지 모르겠는 채소들도 몇 가지 꺼냈다. 냉동실을 열자 자숙새우팩이 보였다. 꽁꽁 언 새우들을 그릇에 덜어 전자레인지에 넣고 해동을 시키는 동안 새 프라이팬을 찾아 기름을 두르고 달궈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꺼낸 채소도 적당한 크기로 썰었다. 해동이 끝난 새우를 꺼내고 잘 썰어둔 채소들을 프라이팬에 넣고 볶기 시작했다.


  헐렁한 티셔츠를 입고 부엌에서 요리하는 연하남의 모습이라니. 지민은 바쁘게 움직이는 정국의 뒷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광대가 주체가 되지 않고 있었다. 고소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찬장에서 꺼낸 그릇에 완성된 볶음밥을 담고 계란후라이까지 올렸다. 오늘 처음 만난 사이에 저녁까지 만들어 주고 있는 상황이 어색해서 정국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 채로 지민의 앞에 볶음밥이 담긴 그릇을 놓아주었다.


  “우리 토끼 요리도 잘하네?”

  “그놈의 토끼 소리는 진짜.”


  아차. 속으로만 생각한다는 게. 정국은 토끼눈이 되어 지민의 얼굴을 바라봤다. 듣지 못한 건지 지민은 정국이 만든 새우 볶음밥을 보고 있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려는 찰나 지민이 고개를 들고 정국을 똑바로 바라봤다.


  “토끼 싫어?”

  “예?”

  “왜, 토끼 귀엽잖아.”

  “토끼는 귀엽죠.”

  “그럼 좋은 거니까 됐어.”

  “아니 사람보고 왜 자꾸 토끼래요.”

  “닮았으니까!”

  “제가요?”

  “응.”

  “제가 어딜 봐서요!”

  “너 거울 안 봐?”

  “허, 참.”


  도저히 말로 이길 자신이 없었다. 정국은 이 답답한 심정을 누가 대변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애꿎은 새우만 숟가락으로 괴롭혔다. 머리에서 김 나겠다. 수저로 밥을 푹푹 찌르고 있는 정국을 보며 지민은 푸스스 웃었다.


  “소용없어. 네가 아무리 싫다 해도 난 이미 널 토끼라고 생각했으니까.”


  호칭에 대한 불만은 그렇게 제대로 싫다고 말하기도 전에 원천봉쇄 되었다. 정국은 체념한 표정으로 볶음밥을 퍼먹었다.



 

  밥을 다 먹고 설거지까지 완벽하게 한 후 엉망이 된 주방을 깨끗하게 정리했다. 일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집안일까지 하게 되다니. 아무리 보스가 직접 맡긴 일이라지만, 추가수당을 요구해도 될 정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엌을 정리하고 나와 집안을 천천히 구경하는데 처음 봤을 때 우와 싶었던 집이 갑자기 무섭게 다가왔다.


  “설마 여기 제가 다 청소해야 하는 거 아니죠? 저 하는 일이 뭐 가정부 그런 거예요?”


  지민은 심각해 보이는 정국의 표정을 보니 조금 놀리고 싶어졌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삼키며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연하지. 나 아침은 항상 샐러드 먹어. 다 먹은 후엔 모닝커피 한 잔을 타와야 하고, 먼지 있는 거 싫으니까 구석구석 잘 청소하고. 잘할 수 있지?”


  이런 시발, 뭐요? 턱 끝까지 차오르는 말을 겨우겨우 삼킨 정국이 발끝을 내려다보며 크게 심호흡했다. 그러지 않으면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욕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후우. 허리를 두 손으로 짚은 채, 눈을 감고 숨을 고르는 정국을 보며 지민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아무튼, 난 먼저 들어갈 테니까 넌 저쪽 방 쓰면 되고, 무슨 일 있으면 불러.”


  내일 아침이면 끝날 놀림이었지만 씩씩거리고 있는 정국이 귀여워서 지민은 조금 더 놀리기로 했다. 웃음을 꾹 참고 방문을 열고 들어온 지민은 침대로 뛰어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홀로 남은 정국은 허망한 표정으로 지민이 사라진 방문을 바라보다가 터덜터덜 자신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곧바로 침대로 가 누운 정국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내일 진지하게 보스를 다시 찾아가야 하나 고민했다.


 

 

  아침 6시에 맞춰뒀던 알람이 요란하게 울려댔다. 정국은 얼굴을 찌푸리고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로 손을 뻗어 침대 옆 협탁 위를 더듬거렸다. 진동하고 있는 핸드폰이 손에 잡혔다. 알람을 끄자 방안은 언제 소란스러웠냐는 듯 조용해졌다. 다시 잠들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 괴로움에 잠시 침대 위에서 버둥거리던 정국은 정확히 알람이 울린 지 9분 후에 침대에서 나올 수 있었다.


  방에 딸린 작은 화장실에서 이를 닦고 세수만 하고 나오자 6시 20분이었다. 샐러드는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 거지. 하품하면서 방에서 나오던 정국은 부엌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뒷머리를 긁던 손을 멈췄다. 지민이 이 시간에 일어나서 스스로 아침을 만들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았기에 부엌에 있는 사람은 침입자가 틀림없었다. 여기까지 올 생각을 하다니 간도 큰 침입자라고 생각하며 정국은 발소리를 죽이고 부엌으로 조심히 다가갔다. 그리고.


  “꺄아악!”

  “으아악!”


  부엌에서 나오던 여성과 딱 마주쳤고 놀란 여성이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덩달아 놀란 정국도 따라 소리를 질렀다.


  “누, 누구세요?”

  “그러는 그쪽은 누구세요?”


  여성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자기는 이 집에서 일하는 가사도우미라고 소개했다. 가사도우미요? 지민으로부터 가사도우미가 있다는 말을 듣지도 못했을뿐더러, 꼭 자신보고 가사도우미 일을 하라는 뉘앙스였기에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정국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눈앞의 여성의 신분을 의심하는 일이었다.


  “진짜 이 집 가사도우미예요?”


  표정을 굳힌 정국이 한 발짝씩 여성을 몰아가며 물었다. 헐렁한 티와 잠옷 바지 차림의 앳되어 보이던 얼굴이 심상치 않게 변하자 긴장한 듯 여성은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네, 맞아요. 그런데 진짜 누구세요? 여기 집 주인분 혼자 사시는 거 아니었나?”

  “저한테 가사도우미가 있다는 말 안 했는데. 아침마다 샐러드 먹는다고 만들라고 했는데….”


  의심 가득한 눈으로 여성을 보던 정국의 시야 끝에 무언가 걸렸다. 예쁘게 잘 담긴 샐러드였다. 어? 침입자가 이런 걸 어떻게 알지. 눈을 가늘게 뜨고 샐러드를 바라보고 있으니 여성이 잔뜩 움츠러들었던 몸을 펴고 반대로 정국에게 따지듯 묻기 시작했다.


  “학생이야말로 뭐예요? 이런 동생이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동생 아니에요.”

  “그럼 대체 누구예요?”

  “제 동거인요.”


 정국과 여성의 시선이 부엌에 등장한 제삼자에게로 향했다. 붕 뜬 머리를 손으로 꾹꾹 누르며 지민이 걸어오고 있었다. 아직 졸음이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뭔데 아침부터 소리를 질러서 자는 사람을 깨워?”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 지민의 얼굴에 여성이 안절부절못하며 냉수를 따라 건넸다.


  “어유, 미안해요. 처음 보는 학생이 튀어나와서 놀라서 그만.”

  “괜찮아요. 아주머니한테 한 말은 아니었어요.”


  여성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인 지민이 냉수 한 잔을 비우고 테이블 위에 컵을 내려놓았다. 하품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아직 멍청한 표정으로 서 있는 정국을 바라봤다.


  “오구, 토끼 놀랐어?”


  탄탄한 엉덩이를 툭툭 두드려 주는 것은 서비스였다. 아, 좀. 하지 마세요. 목소리를 낮춘 채로 지민의 손을 잡아 자신의 엉덩이로부터 떼어낸 정국이 밀려오는 머쓱함에 고개를 숙이고 발끝만 내려다봤다. 일어난 김에 아침 일찍 드실래요? 네, 그럴게요. 금방 준비할게요. 자연스럽게 지민과 여성이 대화하는 것을 듣고 있자니 처음부터 자신에게 가사도우미가 있다고 말을 해줬으면 없었을 일 아닌가 싶어 정국은 억울해졌다. 아침으로 샐러드를 만들라는 것도 자신을 놀리려던 의도가 틀림없었다.


  지민은 묘하게 부루퉁한 정국이 너무 귀여워서 춤이라도 추고 싶은 정도였다. 나란히 앉아 간단한 아침을 먹는 동안 놀린 것 때문에 삐졌는지 정국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내가 너무 심했나. 지민은 느릿느릿 토스트를 먹고 있는 정국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확실히 어제 봤던 얼굴보단 삐져있는 것 같긴 했다. 밥 먹고 미안하다고 해야지. 지민은 정국이 현재 평소보다 이른 기상 시간에 졸려 하고 있을 뿐 아무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   *   *






  첫날이 무사히 지나고 둘째 날부터는 똑같은 일상의 반복이었다. 사무실로 내려가 지민의 일을 돕고, 말이 돕는다지 사실은 정국이 다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해가 지기 시작하면 가장 꼭대기 층의 집으로 올라왔다. 저녁은 지민이 미리 부하를 시켜 사오게 하거나 하는 식이었으며, 아주 가끔 정국이 볶음밥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볶음밥밖에 못 해? 먹기 싫으면 말아요. 그 날 이후로 지민은 정국에게 절대 볶음밥만 할 줄 아냐는 뉘앙스의 말은 꺼내지 않았다.


  지민은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보다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는 시간이 더 많았다. 정국은 서류뭉치를 들고 지민 대신 책상에 앉아 아직도 침대에서 나오지 않는 지민을 노려보았다. 내 팔자가 어쩌다가. 속으로 한탄을 하다가도 차라리 지민이 일어나 있는 것보다 저렇게 침대와 한몸이 되어 있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민은 틈만 나면 정국의 엉덩이를 만지지 못해 안달이었기에. 일만 봐주고 무슨 일 안 생기게 잘 지키고 하면 된다면서요. 이렇게 엉덩이 순정을 내줘야 한다는 말은 없지 않았습니까? 정국은 존경해 마지않는 보스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씩씩거리며 분노에 휩싸여 하루 치 일을 오전에 다 끝내버린 정국은 곧 허탈해졌다. 남은 시간은 이제 뭐 하고 때우지. 엉덩이를 만지려는 지민의 손길로부터 일 핑계를 대며 도망치지도 못하게 되었다. 정국은 푹신한 의자에 파묻혀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오늘따라 날씨가 맑기도 참 맑았다.


  정국은 이런 바닥에서 살아온 사람치고는 굉장히 곧고 맑은 사람이었는데, 특히 사랑에 관해서 굉장히 순정적인 사람이었다. 입을 맞추는 것도, 손을 잡는 것도, 섹스하는 것도 모두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굳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이렇게 불쑥불쑥 자신의 엉덩이를 노리는 지민의 태도에 얼굴이 홍당무처럼 변하기 일쑤였다. 게다가 살아가기 바빠 진심으로 사랑이란 걸 만나본 적이 없었기에 경험이 많을 것이라는 추측과는 달리 성적인 부분에서는 면역력이 거의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따라서 조심성 없는 지민의 움직임에 자꾸 드러나는 하얀 속살이나 자꾸 끈적한 손길로 자신의 엉덩이를 움켜쥐는 행동에 의연해질 수가 없었다. 아, 왜 이런 시련을 저한테. 믿지도 않는 신을 찾으며 한숨을 푹푹 쉬고 있는데 하얀 손이 뒤에서 튀어나와 눈을 가린다.


  “까꿍!”

  “아, 진짜 애도 아니고 왜 그래요.”


  정국이 굳은 얼굴로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있던 지민의 손을 잡아 내렸다. 재밌잖아. 어, 어어? 자신보다 키가 큰 정국의 뒤에 까치발을 든 채로 서 있던 지민은 균형을 잃은 척 미끄러지며 정국의 가슴을 끌어안는 것에 성공했다.


  “아, 조심 좀 하지.”


  정국이 툴툴거리며 지민을 바로 세우려고 팔을 붙잡았지만, 지민은 꼼짝도 하지 않고 껌딱지처럼 정국에게 붙어있었다.


  “이것 좀 놔 봐요. 괜찮아요?”


  지민의 하얀 손등 위를 찰싹 때려가면서까지 떼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정확하게 2초 뒤, 정국은 지민의 의도를 깨닫는다. 스멀스멀 가슴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결국 참지 못하고 지민의 손을 잡아떼어냈다.


  “아, 진짜! 이젠 엉덩이로는 부족해요?”

  “와…너, 너, 자식.”

  “뭐요!”

  “가슴도 탄탄하고. 이 녀석 몸이 아주….”

  “더 말하면 진짜 성희롱으로 고소할 줄 알아요!”

  “알겠어, 알겠어.”


  그렇게 말하는 지민의 얼굴은 이미 만족감으로 가득했기 때문에 정국은 왠지 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귀 끝이 붉어진 채로 자신을 보며 씩씩거리고 있는 정국을 보며 지민은 깨물어 주고 싶다는 무시무시한 생각을 하며 정국의 탄탄한 팔을 콕콕 찔렀다.


  “오늘 저녁 외식할까?”

  “맨날 사 먹는데 외식이 특별할 게 있습니까?”

  “특별한 게 먹고 싶어? 그렇다면…박지민 수제 김치찌개! 어때?”

  “이번엔 진짜 집 태워 먹을 것 같으니까 나가서 먹어요.”

  “그렇게 대놓고 말하니까 서운하잖아. 그땐 진짜 실수였다니까?”


  정국은 대답 없이 고개만 저었다. 하, 날 이렇게 못 믿어서야. 우리 토끼. 지민도 따라 고개를 젓기 시작했다.


  “아무튼, 난 좀 더 누워있을 테니까 남은 일 힘내고!”


  이제 인사 수준이 된 궁디팡팡까지 한 후 지민은 얄밉게도 사무실에 딸린 방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침대에 다이빙하는 모습을 보며 정국은 자리에 앉아 한숨만 푹푹 쉬었다. 여기 있다가는 정말 십 년은 늙어서 나갈 것만 같았다.






*   *   *






  누군가 그러지 않았는가.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정국은 지민이 엉덩이를 만져도 전처럼 펄쩍 뛰지 않고 의연하게 넘어갈 수 있게 되었다. 엉덩이의 순정을 완전히 잃었다는 생각에 울적해질 때도 있었지만, 하지 말라고 한다고 말을 들을 사람도 아니었고 하나하나 반응했다간 일도 제대로 못 할 것이 뻔했다. 정국이 조금 틈만 보이면 시도 때도 없이 만져댔으니까.


  반면 지민은 최근 들어 반응이 시원찮아 진 정국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놀라서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펄쩍 뛰는 게 귀여웠는데. 소파에 앉아 두 다리를 달랑거리며 지민은 생각했다. 엉덩이에 익숙해졌으니까 다른 곳을 만져야 하나. 지민의 작은 머릿속에서 무슨 생각들이 펼쳐지고 있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정국은 태평하게 저녁 메뉴를 고민하고 있었다. 이건 어제 먹었고, 저건 삼 일 전에 먹었고….


  서류를 들여다보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정국을 보며 지민은 흐뭇하게 웃었다. 일하는 모습도 잘났지, 우리 토끼. 정국이 들으면 질겁할 소리지만, 정작 정국은 일하면서 딴생각을 하는 중이어서 듣지 못했다.


  최근 들어 정국은 ‘내가 이렇게 엉덩이 순정까지 내줬는데, 사치 정도는 부려도 되지 않겠어.’ 마인드로 살아가고 있었다. 사치라고 해봤자 매 끼니 비싸고, 물론 정국의 기준에서이다, 다른 음식을 먹는 정도였다.


  “정국아. 나 오랜만에 볶음밥이 먹고 싶다.”


  저녁 메뉴를 고르는 것은 최근 정국의 일과 중 가장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신중하게 고민을 하고 있는데 그 속을 모르는 지민은 태연하게 볶음밥이 먹고 싶다는 말이나 하고 있었다. 정국이 발끈한 얼굴로 지민을 바라봤다. 방금 막 삼겹살을 구워 먹고 싶다고 생각을 한 참이었다.


  “아니, 볶음밥은 얼마 전에도 먹었잖아요.”

  “또 먹고 싶어.”


  눈앞에서 삼겹살이 잘 있어, 다음에 봐! 인사를 건넨다. 정국은 허망한 얼굴로 하얀 종이로 시선을 내렸다. 내 고기….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런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민은 천진한 목소리로 가끔은 사람이 집밥도 먹어줘야지, 라며 두 다리를 더 힘차게 흔들고 있었다. 정국은 체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루 볶음밥 먹는다고 죽지 않아.


  지민은 정국에게 앞치마를 입힐 생각에 아주 신이 나 있는 상태였다. 오늘은 조금 일찍 집으로 올라가야겠다. 지민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소파에 엎드려 누웠다. 말을 해도 한 번에 알아듣는 적이 없던 기존의 부하들을 생각하면 정국은 정말 똑똑하고 일을 잘했기 때문에 늦게까지 사무실에 남을 이유가 없었다. 정국은 정국 나름대로 할 일이 태산이었던 기존 사무실과 달리 할 일이라곤 매장의 매출을 서류로 확인하고 관리하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몸은 더 편안했다. 아니, 이걸 편안하다고 할 수 있는가. 이젠 아예 소파에 누워 이쪽을 바라보는 지민을 보고 있으니 저 천진스러운 미소 뒤에 또 어떤 음흉한 생각을 하고 있을지 닭살이 오소소 돋았다.


  마지막 남은 영수증을 미적거리며 확인하고 있는데 이런 곳에서 눈치는 어찌나 빠른지 지민이 배가 고프니 어서 집에 가자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평소보다도 이른 시간의 퇴근이었다. 사실, 정국으로서는 퇴근이 퇴근 같지 않았지만.

 



  집으로 올라오기가 무섭게 부엌으로 뛰어들어간 지민이 불쑥 내미는 것을 받아든 정국은 손안에 잡힌 것을 확인하자 헛웃음이 나왔다. 앞치마였다. 그것도 아주 깜찍한 토끼가 그려져 있는.


  “이건 뭔데요.”

  “뭐긴, 앞치마지.”

  “이걸 왜 저한테 주세요.”

  “너 요리할 거니까.”


  뭐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눈빛이었다. 지민의 뻔뻔함에 말을 잃은 정국은 재촉하는 지민 때문에 손만 씻은 채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앞치마를 둘러매야 했다. 퇴근해도 퇴근한 게 아니라고 툴툴거리면서도 제법 야무지게 채소를 손질하고 밥을 볶았다. 계란후라이도 완숙과 반숙의 미묘한 경계에 잘 맞춰서 완성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지민의 앞에 놓아주고 앞치마를 벗으려는데 지민의 손에 저지당하고 말았다.


  “이거 언제까지 입고 있어야 해요?”

  “밥 다 먹으면 설거지도 해야 하잖아.”

  “그럼 그때 다시 하면 되잖아요.”

  “그냥 하고 먹어.”

  “왜요.”

  “내가 보고 싶으니까.”

  “허, 참, 진짜. ”


  지민은 막무가내였고 온종일 붙어있는 사람으로서의 의견은 말이 통할 상대가 아니니 그냥 원하는 대로 해주자, 였다. 앙증맞은 핑크색의 앞치마를 걸고 있는 정국은 제법 그 나이 또래 남자애처럼 보였다.


  “정국아, 근데 너 대학 가고 싶은 생각은 없어?”

  “갑자기 뜬금없이 웬 대학이에요.”

  “그냥. 그 또래니까…. 사정상 못 갔지만 가고 싶을 수도 있잖아.”

  “생각 없어요.”

  “진짜?”

  “네.”


  정국은 정말 대학의 ㄷ자에도 관심이 없다는 표정으로 밥을 퍼먹었다. 되려 어딘가 아쉬워지는 것은 지민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한 그릇을 뚝딱 비운 정국이 싱크대에 그릇을 가져다 놓은 뒤 다시 앉아 지민이 다 먹기를 기다렸다. 여전히 앞치마를 입은 채로 밥을 다 먹기를 기다리며 앉아 있는 정국이 귀여워 지민은 푸스스 웃었다.


  “형은 원래 그렇게 웃음이 많은 사람이에요?”


  이제 제법 편해졌는지 정국은 곧잘 먼저 말을 걸어왔다. 지민은 이런 관계의 변화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에이, 거짓말.”

  “내가 아니라는데 뭐가 거짓말이야!”

  “형 맨날 웃고 있잖아요.”


  정국의 큰 눈이 깜빡인다. 귀여운 토끼는 아무래도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귀엽기도 했고 딱히 나쁜 기분도 아니어서 딱히 정정할 필요성을 못 느끼긴 했지만 이런 쪽으로 순진한 정국을 놀리는 것은 꽤 재밌는 일이었기에 지민은 눈꼬리를 접어 웃으며 끈적한 눈길로 앞치마를 걸친 몸을 훑어내렸다.


  “다 널 좋아해서 그런 거지.”

  “아잇, 진짜! 그렇게 보지 마요!”

  “이렇게 보는 게 어떻게 보는 건데?”

  “어, 어….”


  눈에 띄게 당황하는 정국을 보며 지민은 작게 킥킥 웃었다. 역시 정국이 놀리는 게 세상에서 제일 재밌어.


  “응? 어떻게 보는 건데? 알아야 이제 안 하지.”

  “아니, 막, 그, 막, 끈적한 눈길! 끈적한 눈길로 보지 마요!”

  “난 그렇게 본 적 없는데?”


  정국은 살면서 만난 사람 중에 가장 뻔뻔한 사람을 꼽으라면 단 0.1초도 망설이지 않고 지민을 고를 자신이 있었다.


  “아니, 방금까지도 그렇게 봤잖아요! 막 내 몸! 몸을 막…!”

  “몸을 어쨌다구! 억울하다, 형을 그렇게 보고 있었다니.”

  “아니, 무슨 소리예요. 발뺌하지 마요. 막 엄청 끈적하게 훑어봤잖아요! 형이 막 그렇게 볼 때마다, 어? 부끄럽다고요!”

  “흐응. 정국이 부끄러웠어?”


  귀여운 연하남을 바라보는 흐뭇한 지민의 표정과 마주한 순간 정국은 또 지민의 페이스에 말려들었음을 깨달았다. 하. 깊은 한숨이 단전에서부터 터져 나왔다. 더 마주하고 있다가는 또 말려들 것 같았기에 깨끗하게 비어 있는 지민의 그릇을 챙겨 들고 일어섰다. 설거지하기 위해 싱크대 앞에 선 정국의 뒷모습을 보며 지민은 휘파람을 불었다. 탄탄한 몸매를 감싼 하얀 셔츠와 허리를 가로지르는 앙증맞은 앞치마 끈이 묘하게 자극적이었다. 전에 만졌을 때 보니까 허벅지도 탄탄하던데. 지민은 정국의 허벅지를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설거지하는 내내 떨어지지 않는 지민의 시선에 정국은 얼굴로 오르는 열을 주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이런 쪽으로 경험이 많은 게 아니라지만 정국은 성인 남성이었고, 시선에 담긴 의도를 모를 리가 없었다. 엉덩이를 만져지는 것에는 익숙해졌다지만 노골적인 섹스어필은 도저히 익숙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시선이나 손길이 부끄러운 것도 있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지민이 보스의 정부라는 점이었다.


  결국, 설거지를 끝내고 앞치마를 벗어 정리해두며 정국은 여전히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식탁에 앉아 있는 지민을 향해 다가갔다. 흔들릴 정도로 거칠게 식탁을 잡은 정국이 지민을 빤히 바라봤다. 눈을 피하기만 하던 처음에 비하면 큰 발전이었다. 왜? 지민이 입 모양을 뻥긋거렸다.


  “보스가 형 이러는 거 알아요?”

  “응?”

  “이렇게 부하라고 보내준 사람한테 막 이러는 거 아냐구요.”

  “아하, 난 또 무슨 소리 하나 했네.”


  심각해 보이는 정국의 표정과 달리 지민은 표정의 변화가 전혀 없었다. 여전히 콧노래를 흥얼거리기까지 했다. 애인이 부하의 엉덩이를 시도 때도 없이 만지고 끈적한 눈빛을 보내온다는데 하하 웃어넘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심각한 문제인데 전혀 심각하게 느끼지 않는 것 같은 지민의 태도에 정국은 조금 화가 났다.


  “아무한테나 이래요? 이러는 거 보스는 다 아는데 괜찮다고 하는 거예요?”


  화가 난 듯한 목소리에 지민이 콧노래를 멈추고 표정을 굳힌 채로 정국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아니. 아무한테나 안 그래. 당연히 마음에 드는 사람한테만 그러지.”


  정국이 얼굴을 찌푸렸다. 평소의 정국과는 백팔십도 다른 분위기였지만 지민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역시 찡그리니까 섹시하네. 정국이 들었다면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오냐고 따질만한 생각을 하며 지민은 턱을 괸 채로 식탁을 짚은 채 허리를 숙이고 있는 정국을 올려다봤다.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면 화들짝 놀라 피하기 바쁘던 정국이 이번만큼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두 번째 질문 답은 응. 나는 내가 가지고 싶은 거 다 가져.”


  태연하고 뻔뻔한 태도였다. 지민을 만나기 전, 혹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의 정국이었다면 화가 치밀었을 말일 텐데 이상하게도 그렇게까지 화가 나진 않았다.


  “근데 너만 아직 못 가졌네.”


  정국은 지민의 빨간 입술을 바라봤다. 오동통하고 툭 튀어나온 입술 사이로 붉은 혀가 빼꼼 인사를 한다.


  “그러니까 가질 거야.”

  “누구 맘대로요.”

  “내 맘대로. 내가 한 말 뭐로 들었어? 난 가지고 싶은 거 다 가졌다니까. 너도 나한테 넘어오게 될걸.”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인지 지민이 새초롬한 표정으로 정국을 빤히 올려다봤다. 하이고. 정국의 입에선 절로 곡소리가 나왔다. 훌륭한 보스가 어쩌다 이런 사람한테 코를 꿰었을까. 화난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어딘가 아련해진 정국을 보던 지민이 아직 풀지 못한 정국의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코끝이 맞닿는 거리에서 멈춘 뽀뽀를 하듯 입으로 쪽 소리를 냈다. 정국의 귓가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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